영적인 전쟁은 이미 인간의 타락과 더불어서 시작되었지만, 오늘에 이른 다원주의 사회에서 영적인 전쟁은 그 도를 넘어서 구원의 의미가 퇴색되어도 한참 퇴색된 느낌이 든다. 오늘 읽은 기독일보 기사 속에서 보편 구원론에 대한 언급은 우리가 진정한 분별력을 갖지 않는다면, 세속주의 관용에 우리의 영혼도 빼앗기지 않을까, 생명을 걸고 신앙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위기의식이 인다.

미국이란 나라가 청교도로 시작해서, 경건주의 영향으로 오랫동안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속에 온 세계에 리더십을 발휘하고 나누어 주는 나라로 존립하는 이유의 근저가 성경을 중심으로 한 청교도와 경건주의 영향임을 부인하긴 어렵다. 그럼에도 미국 기독교 인구의 25%가 예수 안 믿어도 구원받는 다는 의식은 종교 다원주의와 보편주의가 얼마나 그 맹위를 발휘하고 있는지, 믿음 안에서 깨어 있지 않으면 강단에서도 보편 구원론을 설파할 날이 멀지 않을 것이란 예감이 든다.

이미 미국 교회 안엔 성직자에게 까지, 동성애자 이슈로 어설픈 휴매니즘이 점점 거센 쓰나미처럼 교계를 흔드는 마당에, 오히려 로마의 박해 시대보다 더욱 순교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냄비 안에 갇힌 개구리 꼴로 신앙생활 하지 말라는 법이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스스로 마음을 추수리어 본다.

가만히 보면, 종교에 관계없이 구원 받는 다는 생각이 파고드는 서푼짜리 교인들을 우린 쉽게 만난다. 조금은 의식 있고 지성이 있다는 사람들 가운데서 발견해 보는 이러저러한 대화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상실된 문화적 그리스도인들을 어렵지 않게 만나기 때문이다. 오히려 만인 구원론을 설파하는 사람들이 세상에선 열린 사람처럼 칭찬받는 세상에 혹시라도 마음속 구석엔 나도 저런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부러움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아는 사람인가, 회의가 인다.

예수와 관계없는 교인들, 즉 교회 다니는 사람들(Churchgoers)이 넘쳐나는 미국의 영적기상도를 바라보면서, 어설픈 영성에 자신의 영혼과 신앙까지도 방임하는 우매함을 경계치 않을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우리 한인 교회는 어느 방향으로 믿음의 삶을 이어갈지, 차세대와 그 후 세대를 생각하면서 기도와 더불어 철저히 성경을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목회적 본질을 다시금 일깨워 본다.

과거 미국이나 한국에서 가르쳤던 캘빈의 기독교 강요나 하이델베르크 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등 아름다운 유산을 생각해 본다. 아울러 좋은 신앙 서적으로 성도들의 의식을 고양하고 영적 분별력을 갖게 함이 잘못된 문화나 영성들을 분별할 수 있는 은혜에 속한 의식을 키워주는 사역이 아닐까 여겨본다. 무엇보다도 성경말씀을 철저히 가르치셨던 선배 목사님들의 헌신을 생각해 보면서, 양의 가죽을 쓴 이리들로 가득한 문화 속에 깨어있는 신앙에 대한 사명이 무엇인지, 교회가 가졌던 좋은 유산들을 잘 간직하고 실천함이 너무도 귀하다는 도전으로 목회의 본질을 되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