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주 선교의 아버지 이기풍 목사
1907년 9월 19일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조직되었을 때 한국인 목사 7명이 탄생하였다. 이 일이 감사하여 독노회에서는 이기풍 목사(1865-1942)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이기풍 목사는 그의 부인 윤함라와 함께 평양에서 인천으로 해서 목포까지 배편으로 갔다. 이 목사는 부인과 헤어져 배를 타고 제주도를 가야 하는데 갑자기 부인에게 “나 제주도 못가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부인은 이기풍 목사에게 “당신이 안 가면 제주도에 사는 그 수많은 영혼들은 누가 책임을 지겠습니까”라고 가야 한다면서 화를 내 이기풍 목사는 할 수 없이 제주도로 가는 배를 목포에서 타고 출항을 하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제주도 가까이 와서 풍랑을 만나자 배가 파선을 당했지만 겨우 살아 본토에 도착을 하였다.
제주도는 기독교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지역이었기에 그를 반가이 맞이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더구나 육지에서 왔기에 냉대가 극심하자 밤만 되면 보통 걱정이 아니었다. 할 수 없이 개나리 봇짐 하나 메고 밤에는 남의 집 헛간에서 잠을 자고 낮에는 쪽복음을 들고 다니면서 전도를 하였다. 아무도 그를 환영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고생하는 모습을 보시고 1908년 2월 이미 서울에서 예수를 믿었던 김재원을 만나게 해주셨고, 그의 협조로 홍순홍, 김행권 등과 함께 예배를 드림으로 제주 성내교회(城內敎會)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자리를 잡아가던 가운데 갑신정변으로 서울에서 유배당하여 제주도에 머물었던 박영호 100원을 희사하자 그 돈으로 옛 훈련청 청사(廳舍)을 매입하여 예배처소를 정하였다. 이기풍 목사는 그 넓은 제주도에 하루 속히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면서 무리하게 사역을 하다가 그만 병을 얻고 말았다. 병을 얻기 전에는 자신의 선교가 너무 힘들어서 자신의 은사였던 교장 마펫(S. A. Moffet, 마포삼열) 선교사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 서신을 받아보았던 마펫 교장은 곧 답장을 보냈다.
“아직 내 턱에 흉터가 남아 있습니다. 이 흉터가 없어지면 육지에서 목회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겠습니다.”
마펫은 1893년 평양에 도착하여 평양 선교기지를 마련하고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때 길거리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난데없는 돌맹이 하나가 날아와 마펫 턱에 부딪치고 말았다. 이때 마펫은 그 돌맹이가 날아온 쪽을 바라보면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마펫은 평양에 도착한지 1년 후인 1894년에 평양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시 외곽으로 피난을 가고 있었다. 이기풍은 원래 평양에서 박치기로 유명한 깡패였다. 언제나 마을에서 동평양과 서평양이 싸움이 일어나면 서평양을 대표해서 나가 싸워 항상 이기고 돌아왔었다. 이러한 깡패가 청일전쟁을 피해 원산으로 피난을 가고 있었다. 원산에 도착한 이기풍은 재간이 있어서 긴 담배 대에 그림을 그려주고 그 대가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장에 나가 담배 대에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왠 스왈렌(한국명, 소안론) 선교사가 지나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언 듯 마펫 선교사가 생각이 났었다. 그래서 그는 그 길로 마펫 선교사집을 방문하여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예수를 믿겠다고 하자 마펫은 감사해서 그를 응접실로 들어오게 하였다.
“선교사님, 제가 누구인지 잘 모르시겠지요, 1년 전에 평양에서 돌로 쳤던 평양 깡패 이기풍입니다. 이제 예수 믿기로 하고 그때 일을 용서해 달라고 왔습니다.”
“이기풍 형제 저는 다 잊었지만 턱 밑에 맞았던 그 흉터는 지금도 있습니다. 걱정 마시고 예수만 잘 믿으시고 장대현교회에 출석하면 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기풍은 장대현교회를 다니면서 마펫 선교사의 설교에 은혜를 받고 자진해서 마펫 선교사에게 부탁을 하였다. “저를 선교사님의 심부름꾼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잘 하겠습니다.” 이 말에 놀란 마펫은 너무 감사해서 그 자리에서 이기풍 머리 위에 손을 언고 하나님께 축복 기도를 해 주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이기풍은 마펫 선교사의 조사가 되었다. 그 후에 평양에 장로회신학교가 문을 열자 이기풍도 이때 신학교에 지원을 하여 면접에 합격을 한 후 신학생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기풍는 1907년 6월에 신학교를 졸업을 하고 그해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조직될 때 첫 목사 7명이 탄생되었다. 이 중 이기풍는 제주도 선교사로 가게 됐다.
제주도에서 목회사역이 너무 힘들어 육지로 보내 달라고 하였지만 마펫 선교사의 턱 아래 흉터가 거의 없어질 무렵 10년후 인 1918년 광주 제일교회 초빙을 받고 육지로 나오게 됐다. 1920년 2월 순천중앙교회에 부임하여 그 곳에서 목회를 하면서 제10회(1921년)총회에서 총회장이 됐다. 1923년 순천중앙교회를 사임하고 고흥읍교회, 벌교읍교회 거쳐서 잠시 제주 성내교회에서 시무하면서 지금 성내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강대상을 사용하였다. 유일한 이기풍 목사의 유품이 됐다. 성내교회 교회당 뜰 안에 있는 팽나무가 있으며, 이 나무는 이기풍 목사가 성내교회를 창립 이전에 있는 나무로서 그의 딸 이사례가 심방하고 돌아오는 그 모습을 보고 싶어서 기다렸던 그 나무가 100년이 지나 지금도 그 나무가 성내교회를 지키고 있다. 성내교회를 사임하고 여수 앞바다에 있는 우학리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신사참배반대 운동을 하다가 광주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다가 연로하여 가석방을 받고 우학리교회로 다시 돌아와 설교를 하다가 1942년 6월 우학리교회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김수진 목사(한국교회역사연구원장,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전문위원장)
1907년 9월 19일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조직되었을 때 한국인 목사 7명이 탄생하였다. 이 일이 감사하여 독노회에서는 이기풍 목사(1865-1942)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이기풍 목사는 그의 부인 윤함라와 함께 평양에서 인천으로 해서 목포까지 배편으로 갔다. 이 목사는 부인과 헤어져 배를 타고 제주도를 가야 하는데 갑자기 부인에게 “나 제주도 못가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부인은 이기풍 목사에게 “당신이 안 가면 제주도에 사는 그 수많은 영혼들은 누가 책임을 지겠습니까”라고 가야 한다면서 화를 내 이기풍 목사는 할 수 없이 제주도로 가는 배를 목포에서 타고 출항을 하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제주도 가까이 와서 풍랑을 만나자 배가 파선을 당했지만 겨우 살아 본토에 도착을 하였다.
제주도는 기독교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지역이었기에 그를 반가이 맞이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더구나 육지에서 왔기에 냉대가 극심하자 밤만 되면 보통 걱정이 아니었다. 할 수 없이 개나리 봇짐 하나 메고 밤에는 남의 집 헛간에서 잠을 자고 낮에는 쪽복음을 들고 다니면서 전도를 하였다. 아무도 그를 환영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고생하는 모습을 보시고 1908년 2월 이미 서울에서 예수를 믿었던 김재원을 만나게 해주셨고, 그의 협조로 홍순홍, 김행권 등과 함께 예배를 드림으로 제주 성내교회(城內敎會)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자리를 잡아가던 가운데 갑신정변으로 서울에서 유배당하여 제주도에 머물었던 박영호 100원을 희사하자 그 돈으로 옛 훈련청 청사(廳舍)을 매입하여 예배처소를 정하였다. 이기풍 목사는 그 넓은 제주도에 하루 속히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면서 무리하게 사역을 하다가 그만 병을 얻고 말았다. 병을 얻기 전에는 자신의 선교가 너무 힘들어서 자신의 은사였던 교장 마펫(S. A. Moffet, 마포삼열) 선교사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 서신을 받아보았던 마펫 교장은 곧 답장을 보냈다.
“아직 내 턱에 흉터가 남아 있습니다. 이 흉터가 없어지면 육지에서 목회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겠습니다.”
마펫은 1893년 평양에 도착하여 평양 선교기지를 마련하고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때 길거리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난데없는 돌맹이 하나가 날아와 마펫 턱에 부딪치고 말았다. 이때 마펫은 그 돌맹이가 날아온 쪽을 바라보면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마펫은 평양에 도착한지 1년 후인 1894년에 평양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시 외곽으로 피난을 가고 있었다. 이기풍은 원래 평양에서 박치기로 유명한 깡패였다. 언제나 마을에서 동평양과 서평양이 싸움이 일어나면 서평양을 대표해서 나가 싸워 항상 이기고 돌아왔었다. 이러한 깡패가 청일전쟁을 피해 원산으로 피난을 가고 있었다. 원산에 도착한 이기풍은 재간이 있어서 긴 담배 대에 그림을 그려주고 그 대가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장에 나가 담배 대에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왠 스왈렌(한국명, 소안론) 선교사가 지나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언 듯 마펫 선교사가 생각이 났었다. 그래서 그는 그 길로 마펫 선교사집을 방문하여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예수를 믿겠다고 하자 마펫은 감사해서 그를 응접실로 들어오게 하였다.
“선교사님, 제가 누구인지 잘 모르시겠지요, 1년 전에 평양에서 돌로 쳤던 평양 깡패 이기풍입니다. 이제 예수 믿기로 하고 그때 일을 용서해 달라고 왔습니다.”
“이기풍 형제 저는 다 잊었지만 턱 밑에 맞았던 그 흉터는 지금도 있습니다. 걱정 마시고 예수만 잘 믿으시고 장대현교회에 출석하면 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기풍은 장대현교회를 다니면서 마펫 선교사의 설교에 은혜를 받고 자진해서 마펫 선교사에게 부탁을 하였다. “저를 선교사님의 심부름꾼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잘 하겠습니다.” 이 말에 놀란 마펫은 너무 감사해서 그 자리에서 이기풍 머리 위에 손을 언고 하나님께 축복 기도를 해 주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이기풍은 마펫 선교사의 조사가 되었다. 그 후에 평양에 장로회신학교가 문을 열자 이기풍도 이때 신학교에 지원을 하여 면접에 합격을 한 후 신학생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기풍는 1907년 6월에 신학교를 졸업을 하고 그해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조직될 때 첫 목사 7명이 탄생되었다. 이 중 이기풍는 제주도 선교사로 가게 됐다.
제주도에서 목회사역이 너무 힘들어 육지로 보내 달라고 하였지만 마펫 선교사의 턱 아래 흉터가 거의 없어질 무렵 10년후 인 1918년 광주 제일교회 초빙을 받고 육지로 나오게 됐다. 1920년 2월 순천중앙교회에 부임하여 그 곳에서 목회를 하면서 제10회(1921년)총회에서 총회장이 됐다. 1923년 순천중앙교회를 사임하고 고흥읍교회, 벌교읍교회 거쳐서 잠시 제주 성내교회에서 시무하면서 지금 성내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강대상을 사용하였다. 유일한 이기풍 목사의 유품이 됐다. 성내교회 교회당 뜰 안에 있는 팽나무가 있으며, 이 나무는 이기풍 목사가 성내교회를 창립 이전에 있는 나무로서 그의 딸 이사례가 심방하고 돌아오는 그 모습을 보고 싶어서 기다렸던 그 나무가 100년이 지나 지금도 그 나무가 성내교회를 지키고 있다. 성내교회를 사임하고 여수 앞바다에 있는 우학리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신사참배반대 운동을 하다가 광주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다가 연로하여 가석방을 받고 우학리교회로 다시 돌아와 설교를 하다가 1942년 6월 우학리교회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김수진 목사(한국교회역사연구원장,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전문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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