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약할 때", 8절 "죄인 되었을 때", 10절 "원수 되었을 때"라고 했습니다.
나의 많은 정죄감과 나의 불완전한 모습, 나의 모습을 보기 때문에 힘이 듭니다. 화평이 깨어집니다.
그 때마다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을 보라는 겁니다. 1절부터 11절까지 화평을 이야기하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다섯 번이 나옵니다. 나를 의롭다 칭해주신 근거도 예수님이고, 화평의 근거도 예수님입니다. 환난과 인내와 연단을 이루어갈 일이 쉬지 않고 엄습할 것입니다. 그 때마다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쉬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신을 바라보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어떻게 해야 될까요. 오늘 바라봤으면 내일은 안 바라봐도 될까요.
그래서 올바른 예배가 쉬지 않고 드려져야 되고 올바른 기도와 올바른 말씀 가운데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날마다 바라봐야 합니다. 순간순간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의 주일 예배, 나눔 예배, 수요 예배 이 모든 예배를 드리는 것이 굉장히 시간을 투자하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한 주일 동안 나를 보지 않고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도와주기 때문에 얼마나 감정의 낭비가 줄어드는지 아십니까. 훨씬 유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간을 줄여주시는 주님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순간순간 나를 보게 됩니다. 말 한 마디하고도 금새 나를 봅니다. ‘내가 말 실수를 했어, 쓸데없는 말을 했어, 말을 해야 될 때인데 못했어, 거긴 괜히 갔어’ 이러면서 나를 보기 때문에 이상한 데 가서는 교만하고 이상한 데 가서는 열등감이 듭니다. 나를 보기 때문에 교만과 열등감이 교대, 교대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화평이 깨집니다.
예수님을 보지 않으면 자신도 남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어도 끊임없이 화평이 깨질 수밖에 없는 것은 나를 보기 때문입니다. 되었다 하는 나를 보기 때문입니다. 후안 카를로스 목사님처럼 그렇게 설교를 잘 해도 '나'를 보는 겁니다. 다 똑같습니다. 금새 믿은 사람이나 오래 믿은 사람이나 '나'를 보기 때문에 화평이 깨집니다. 나는 100% 죄인이기 때문에 나에겐 선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7~8절 -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지선 자매가 아프고 힘든 시간을 지내면서 자기 고통을 천 번, 만 번이라도 대신해줄 수 있는 부모님의 사랑을 알았다고 합니다. 자기 몸을 던져서 동생을 구해준 오빠의 사랑을 알았다고 합니다. 자신을 위해 금식해주는 교회 분의 사랑을 광야 같은 투병생활에서 경험했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그 아픈 고통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자기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사랑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겁니다.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을 경험하고 나니까 화상이 사랑의 흔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백 억을 준다해도, 이 세상을 다 준다해도 바꾸지 않을 내 삶이고 얼굴이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얼굴도 이만하면 꽤 귀엽다' 이렇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이지선 자매의 화상 전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선이는 대학교 2학년 때의 그 아름다운 얼굴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용모 때문에 괴로운 사람 있습니까. 체격 때문에 괴로운 사람 있습니까.
지선이는 썩어질 옛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뭔가 오픈하고 나서 '괜히 오픈했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썩어질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는 얘깁니다. 지선이는 서럽고 힘든 시절 다 지나고 예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이 "너의 찢김과 찔림과 고통과 수치와 부끄러움과 공포와 두려움을 내가 알고 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아시면 우리는 못할 것이 없습니다. 지선이가 병들고 약한 자에게 희망의 메신저가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답니다.
저는 이지선 자매가 감사하면서도 끊임없이 주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화평이 깨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나를 보지 말고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을 그 즉시, 즉시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를 보면 화평이 없습니다. 정말 주님의 보혈을 보아야 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보아야 하는지 모릅니다. 나를 쳐다 볼 때는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내 자신에 대해 절망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됐으면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선물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게 해달라고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올바른 인내와 연단과 소망을 이루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예수 믿고도 정죄감과 나의 완벽주의 때문에 절망할 때 나를 보지 말고 십자가의 예수님만, 이 보혈의 공로만 즉시 즉시 바라보게 해달라고 그래서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많은 정죄감과 나의 불완전한 모습, 나의 모습을 보기 때문에 힘이 듭니다. 화평이 깨어집니다.
그 때마다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을 보라는 겁니다. 1절부터 11절까지 화평을 이야기하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다섯 번이 나옵니다. 나를 의롭다 칭해주신 근거도 예수님이고, 화평의 근거도 예수님입니다. 환난과 인내와 연단을 이루어갈 일이 쉬지 않고 엄습할 것입니다. 그 때마다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쉬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신을 바라보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어떻게 해야 될까요. 오늘 바라봤으면 내일은 안 바라봐도 될까요.
그래서 올바른 예배가 쉬지 않고 드려져야 되고 올바른 기도와 올바른 말씀 가운데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날마다 바라봐야 합니다. 순간순간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의 주일 예배, 나눔 예배, 수요 예배 이 모든 예배를 드리는 것이 굉장히 시간을 투자하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한 주일 동안 나를 보지 않고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도와주기 때문에 얼마나 감정의 낭비가 줄어드는지 아십니까. 훨씬 유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간을 줄여주시는 주님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순간순간 나를 보게 됩니다. 말 한 마디하고도 금새 나를 봅니다. ‘내가 말 실수를 했어, 쓸데없는 말을 했어, 말을 해야 될 때인데 못했어, 거긴 괜히 갔어’ 이러면서 나를 보기 때문에 이상한 데 가서는 교만하고 이상한 데 가서는 열등감이 듭니다. 나를 보기 때문에 교만과 열등감이 교대, 교대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화평이 깨집니다.
예수님을 보지 않으면 자신도 남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어도 끊임없이 화평이 깨질 수밖에 없는 것은 나를 보기 때문입니다. 되었다 하는 나를 보기 때문입니다. 후안 카를로스 목사님처럼 그렇게 설교를 잘 해도 '나'를 보는 겁니다. 다 똑같습니다. 금새 믿은 사람이나 오래 믿은 사람이나 '나'를 보기 때문에 화평이 깨집니다. 나는 100% 죄인이기 때문에 나에겐 선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7~8절 -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지선 자매가 아프고 힘든 시간을 지내면서 자기 고통을 천 번, 만 번이라도 대신해줄 수 있는 부모님의 사랑을 알았다고 합니다. 자기 몸을 던져서 동생을 구해준 오빠의 사랑을 알았다고 합니다. 자신을 위해 금식해주는 교회 분의 사랑을 광야 같은 투병생활에서 경험했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그 아픈 고통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자기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사랑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겁니다.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을 경험하고 나니까 화상이 사랑의 흔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백 억을 준다해도, 이 세상을 다 준다해도 바꾸지 않을 내 삶이고 얼굴이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얼굴도 이만하면 꽤 귀엽다' 이렇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이지선 자매의 화상 전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선이는 대학교 2학년 때의 그 아름다운 얼굴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용모 때문에 괴로운 사람 있습니까. 체격 때문에 괴로운 사람 있습니까.
지선이는 썩어질 옛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뭔가 오픈하고 나서 '괜히 오픈했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썩어질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는 얘깁니다. 지선이는 서럽고 힘든 시절 다 지나고 예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이 "너의 찢김과 찔림과 고통과 수치와 부끄러움과 공포와 두려움을 내가 알고 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아시면 우리는 못할 것이 없습니다. 지선이가 병들고 약한 자에게 희망의 메신저가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답니다.
저는 이지선 자매가 감사하면서도 끊임없이 주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화평이 깨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나를 보지 말고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을 그 즉시, 즉시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를 보면 화평이 없습니다. 정말 주님의 보혈을 보아야 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보아야 하는지 모릅니다. 나를 쳐다 볼 때는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내 자신에 대해 절망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됐으면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선물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게 해달라고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올바른 인내와 연단과 소망을 이루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예수 믿고도 정죄감과 나의 완벽주의 때문에 절망할 때 나를 보지 말고 십자가의 예수님만, 이 보혈의 공로만 즉시 즉시 바라보게 해달라고 그래서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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