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기독일보는 고난주간을 맞아 우리 주님의 사랑과 고난의 의미를 더욱 깊이 묵상하고자 워싱턴주 각 교회의 고난주간 새벽예배 설교를 요약 게재 합니다. 이 지역 모든 성도들과 교계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새롭게 일어나길 바랍니다. -편집자 주-

시애틀평강장로교회 박은일 목사
본문: 마태복음 16장 21-24, 제목: 십자가

십자가.. 우리 모두에게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로마의 처형법에는 십자가형이 있었습니다. 제국을 반항하거나 죄를 지은 사람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행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우리 개신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의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을 이땅에 왕국을 세우시고 왕으로 등극할 메시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말씀하시니 베드로는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 베드로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뒤로 물어 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그 말씀을 듣고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까요? 주께서 하신 이 말씀은 베드로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며 찬란한 영광과 빛나는 면류관을 생각하고 십자가의 고통은 생각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십자가는 고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에게 고난을 받아야 하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꼭 가셔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예루살렘에 가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가셔야 했습니다.

우리가 오늘 십자가를 번쩍이고 부드러운 십자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지신 십자가는 예배당에 높이 걸린 그런 좋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주께서 지신 십자가는 매끈한 나무가 아니라 울퉁불퉁한 나무였습니다. 거칠고 볼 품 없는 그런 남루한 십자가 였습니다. 주님의 손에 박힌 못자국과 주님의 가시 면류관을 생각해 보십시오. 손에 못이 박히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뽀쪽한 가시가 주님의 머리를 찔러 피가 흐르는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왜 주께서 그런 고통을 당하셨습니까? 바로 저와 여려분을 위해서 입니다.

저는 성금요일 오늘 금식을 하려고 합니다. 금식을 통해 주님의 고난을 다 이해할 순 없습니다. 그 모진 고통을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주님께서 나를 위해 얼마나 희생하셨는지 돌아보려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 세상에서 자랑할 것이 있다면 십자가 밖에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이 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까?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고통입니다. 아주 극심한 고통입니다. 사람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십자가 형벌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가장 큰 고통으로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주시고 그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셔습니다. 고통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고통을 참고 인내하는 것이 기독교 입니다. 내가 아플때 인내하면 다른 사람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내가 손해를 보면 다른 사람이 이익을 받습니다. 내가 힘들면 다른 사람의 짐을 덜어주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통은 우리를 위해서 입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는 것이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불평하고 낙심하지 말고 침묵과 믿음을 지키며 주님의 사랑을 닮아 주 안에서 나도 살고 주변의 사람도 살리게 됩니다. 고난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큰 은혜를 마음 깊이 새기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