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교부 오리겐과 키프리안

초대교부들 가운데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한 인물은 오리겐(Origenes)이었습니다. 오리겐의 본명은 ‘오리게네스 아다만티우스(Origenes Adamantius)’입니다. 그는 지금의 이집트에 있는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 있는 경건한 기독교인 부모의 자녀로 약 185년 또는 186년경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그의 아버지 레오니다스로부터 처음에 지식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레오니다스는 202년경 로마제국 황제 셉티무스 세베루스 핍박 시에 참수형을 당하면서 순교하였습니다. 그런 후 오리겐은 판타에누스와 클레멘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클레멘트를 이어 알렉산드리아의 교리문답 학교의 교장이 되었습니다. 오리겐은 금욕적인 삶을 살았으며, 교리 문답 학교에서 그는 기독교 신앙만 아니라 그리스 철학까지 가르쳤습니다. 오리겐은 204년부터 230년까지 가르친 후 232년부터는 죽을 떄까지 팔레스타인의 가이사랴에서 가르쳤습니다.

알렉산드리아로 되돌아온 오리겐은 집필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230년 경 여행 중 팔레스타인의 가이사랴를 지나다가 그곳의 친구들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그곳에서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오리겐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가이사랴에서 사역하던 그는 로마제국 황제 데키우스(Decius)의 핍박으로 인해 감옥에 갇혀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받아 거의 죽게 될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고문의 후유증으로 로마제국 황제 갈루스(Gallus) 때에 69세의 나이로 페니키아의 두로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본명이 카에킬리우스 키프리아누스(Caecilius Cyprianus)인 키프리안은 터툴리안처럼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출신으로 그리스어보다는 라틴어를 사용한 교부입니다. 로마제국의 동부가 과거의 헬라제국의 영향으로 그리스어, 다른 말로 헬라어가 대중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면, 카르타고는 지리적으로 이태리반도와 가까운 위치에 있었고 헬라제국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으므로 라틴어를 사용하는 지역이었습니다.

키프리안은 210년경에 카르타고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부모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훌륭한 교육을 받은 그는 웅변가, 즉 수사학자로서 법률을 배웠습니다. 그 후 그는 카르타고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지만 만족하지 못한 키프리안은 카르타고에서 가장 존경받는 교회 지도자인 카에실리아누스에 의해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 자신의 재산을 포기하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카르타고의 감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250년 로마제국 황제 데키우스의 핍박으로 인해 카르타고를 떠났다가 핍박의 시기 다음 해인 251년 봄, 카르타고로 되돌아왔지만 그는 겁쟁이처럼 도주했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카르타고 교회의 사람들 뿐만 아니라 로마교회 지도자들까지 그를 비난했습니다.

255년 다시금 키프리안은 다른 문제를 맞이했습니다. 이단자들이 주재한 세례가 타당한 것인지 아니면 그른 것인지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로 인해 로마감독 스테판과 논쟁을 벌였습니다. 스테판은 이단자들의 세례도 타당하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또는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합법적으로 행했다면 그 세례가 정당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에 반해 키프리안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을 뿐만 아니라 참된 회개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단자들의 세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러한 논쟁이 한창일 때, 257년 로마제국 황제 발레리아누스(Valerianus)에 의한 핍박이 일어났습니다. 이 핍박으로 인해 로마교회의 감독 스테판과 그의 후계자가 순교하고 말았으며, 키프리안도 258년에 순교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