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기독일보는 고난주간을 맞아 우리 주님의 사랑과 고난의 의미를 더욱 깊이 묵상하고자 워싱턴주 각 교회의 고난주간 새벽예배 설교를 요약 게재 합니다. 이 지역 모든 성도들과 교계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새롭게 일어나길 바랍니다. -편집자 주-

시애틀연합장로교회 장윤기 목사
설교 본문 : 마태복음 27장 27-31 제목 : 멸시당하신 예수님

어제 아침은 고난 당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세상에 오셔서 머리 둘 곳이 없으셨던 예수님은 우리에게 머리둘 곳 있는 천국을 예비하셨고 물 한 모금 못 드신 타는 목마름을 겪으셨으나 우리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하셨습니다. 생명수 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 영혼의 갈함을 시원하게 해주셨고 예수님의 배고픔으로 우리에게 만족을 주셨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예수님의 정신적인 고난을 생각하며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복음서의 3분의 1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고난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구세주이시고 우리의 메시아 이심에도 불구하고 멸시 당하시고 고난 당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는 실패라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조차 예수님께서 실패하신 줄 알았습니다. 놀라운 기적도 행하시고 아름다운 천국복음을 전하셨지만 비참하게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만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전하지만 유대인에게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이 보기에 너무나 거리끼는것이 십자가였습니다. 이방인은 어찌 다른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느냐고 미련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구원을 받은 이들에게는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능력이 어디서 옵니까? 능력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우리는 나음을 입었습니다. 십자가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왜 예수님께서 죽으셨을까, 희생하셨을까를 생각 할때 능력의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십자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거리끼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 십자가를 바라 볼때 능력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배신당하는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여러분 배신 당해본적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친한 친구에게, 은혜를 베풀었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경우가 있습니까? 배신당한 상처는 평생동안 잊혀지지 않는 만큼의 큰 고통입니다. 예수님은 배신당하셨습니다. 3년동안 제자들을 말씀으로 교육하시고 현장에서 기적으로 함께했던 제자들에게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한 제자는 예수님을 은 30에 팔았습니다. 다른 제자는 저주하고 부인했습니다. 또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은 끌려가는데 저들은 살겠다고 도망갔습니다. 세상사람들이 예수를 버렸다고 하면 예수님은 그다지 마음이 아프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배신당할 때 그 아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수제자인 베드로가 어린 비자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 부인하는 모습을 예수님께서 보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살 속에 못이 박히는 고통보다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받은 상처는 말로 할 수 없는 배신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을 찾아가 사랑하시고 용서하셨습니다. 평안하라고 복을 주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며 사랑을 주셨습니다. 가룟 유다가 왜 예수님을 배신했을까요? 유다는 예수님이 왕이 될 줄 알았을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왕이 되실 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말씀하시니 정치적인 왕이 되길 원했던 제자들은 원망도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가룟 유다는 당국자에게 가서 예수님을 고발했습니다. 유다의 생각은 예수님께서 막다른 길에 서게 되면 능력을 발휘해 왕이 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럼 자기도 지위가 높아져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세상의 가치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면 예수님을 배신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절대 배신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것은 교만한 신앙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은사를 받았다고, 주일에 봉사를 많이한다고 해서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말씀과 같이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두려워 해야 합니다. 은혜를 받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수록 겸손해야 합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고난주간에 제자들의 배신을 보며 우리는 배신의 자리에 서지 않도록 자신을 경계하고 겸손의 자리에 서야겠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한 사람에게 멸시당한게 아니라 모든 지위의 사람들에게 멸시당하셨습니다. 공회의원들부터 하인에 이르기까지 예수님께 침 뱉고 얼굴을 가리고 멸시했습니다. 얼굴을 가린다는 것은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공회원들은 유대인의 대표입니다. 또 이방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로마 군인은 예수님을 가짜 왕이라고 희롱을 합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찌어다'라고 조롱했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께 왕의 옷을 입히고 채찍으로 때렸습니다. 동족인 유대인은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조롱하고 이방인들은 채찍질했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의 강도들 조차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여려분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멸시당하고 고난 당하셨습니까?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다시 말해 모든 사람들에게 왜 이처럼 멸시를 당했습니까? 그것은 나 때문에 우리 때문에 이 같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오시기 전에 예수님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인함이라고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억울하게 고난 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전도하다가 주의 일하다가 선한 일 하다가 억울한 일 당한 사람있습니까? 세상에서 열심히 일하지 않고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잘 사는데 예수님 믿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 중에 가난한 사람 있습니까? 우리는 이 때 예수님을 바라보고 낙심하지 말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자기가 시험받아 고난 당하셨음으로 환란자들의 모든 고통을 위로하신다고 나와있습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오셔서 편안하게 살다 가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든 고난을 당하셔서 우리의 온갖 어려움을 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힘이 되시고 위로가 되시고 세상에서 우리를 승리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머니보다 먼저 죽는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자기 어머니가 살아계시는데 어머니보다 먼저 죽는 고통이 얼마나 큰것입니까? 예수님은 효자 중의 효자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부모님을 순종하며 받드셨다고 나와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서도 어머니의 노후를 걱정해 요한에게 부탁합니다.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쉬시며 죽기 전까지 어머니를 걱정하며 요한에게 부탁합니다. 가시면류관을 쓰셔서 얼굴에 피가 흐르고 창으로 찔릴때 어머니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그 어머니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 불효한 우리의 죄때문에 예수님은 불효자처럼 사랑하는 어머니를 남겨두고 십자가에서 떠나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깊은 정신적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돌아가셨습니다. 피와 물까지 다 쏟으셨습니다.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육제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주님의 그 고난을 생각하며 나도 주를 위해 살겠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 고통 당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뜨거운 각오를 해야 할 줄로 압니다. 그런 마음을 가질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고 그 가는 길이 시온의 대로가 되고 막힌 길이 열릴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날 향한 사랑을 깊이 묵상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