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 의사들과 목사들이 합동으로 주관한 치유 세미나에 다녀왔습니다. 이 세미나에서 강의와 토론으로 이어지면서 의사들의 발표와 목사들의 응답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되었지만, 여기서는 그 때의 핵심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치료와 치유는 개념적으로 구분된다는 것입니다. 치료는 세계 보건 기구의 건강에 관한 정의에 따라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인 정상 상태로 돌리는 활동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병을 고치고 정신병을 고치고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관계와 정서 불안을 고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치유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치료와 치유는 같이 일어날 수도 있고 따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육신의 병은 고쳤지만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는 회복되지 않을 수도 있고 육신만 고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도 회복될 수 있고, 육신은 고침을 당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만 회복될 수도 있고, 육신도 고침 받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회복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7:12-19절을 보면 문둥병자 열 명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는데 저는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17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하시면서 이어서 18-19절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9명의 문둥병자는 육신의 질병은 치료되었으나 치유는 일어나지 않고 한 명은 치료와 치유가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영조 목사님처럼 육신의 병은 치료되지 않았으나 복음전하는 일에 헌신하시는 완전 치유된 분이 있고, 사도 바울도 자기 육신의 가시는 그대로 있지만 예수님께 붙잡힌 삶 즉 완전 치유된 삶을 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육신의 병도 고침 받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주변 사람들을 원망하면서 죽어갑니다. 병든 것도 문제지만, 그것으로 인해 주변 사람과의 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채로 살아가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그래서 치유 사역의 궁극적인 목적은 치유하는 것입니다. 치유와 치료는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것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지만, 우리가 치료만 목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치유를 목적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치료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육신의 질병을 치료하심으로 복음을 전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삼으셨습니다. 즉, 예수님에게 있어서 치료는 치유의 수단이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생명과 자녀의 신분을 얻게 하시는 치유가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치료만 보는 것은 달을 가르치는 손가락만 보고 달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면서 치료와 치유의 문제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어려움, 삶의 고난도 같은 원리가 작용합니다. 예수님은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는 말로 요약하셨습니다. 먼저 치유를 구하라 그리하면 치료도 더하여 주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