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던(Post-modern) 시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상징(symbol)의 매력에 쉽게 빠진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시대정신이 감성적이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종교적인 상징이 적절히 배합된 교회를 찾곤 한다. 결국 상징적 분위기가 지배하는 교회 일수록 종교 행위에 대한 보상을 느끼는 감성에 의존된 신앙현상이 있음을 발견한다. 이는 신앙을 상징 행위로 치환해 버리는 위험이 없지 않아 있다. 스스로 종교행위인지 신앙행위인지에 대한 분별도 없이 시간을 투자한 것에 대한 보상 심리로 상징적 분위기 안에 안주하며 하나님이 실종된 신앙으로 종교인화 되어가는 수 없이 많은 처치고어(Churchgoer)에겐 분별과 경계가 필요하지 않을까 여겨본다.

물론 상징적 조형이 비교적 많은 큰 교회와 단순한 공간으로 구성된 작은 교회라는 이원론적인 잣대를 두고 상징이 없는 교회를 전적으로 두둔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엔 미학적 가치와 요소(Esthetic value and elements)를 무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교회의 규모와 관계없이 신앙적 보상을 상징을 통한 카타르시스 현상에 의존됨이 문제라 할 것이다. 여기엔 하나님의 부재 현상이 지배함에도 신앙행위로 착각하는 이기성을 의식하지 못하는 습관화된 종교행위의 위험 때문에 그렇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을 아는 고상한 지식을 갖춘 분별 있는 신앙으로 자신의 신앙의 좌소(左所)가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사귐과 거룩한 영성에 중심되고 있는지, 늘 자문해야 할 것이다.

잘 보면 현대로 올수록 사람들의 생각이나 행위가 개성적인 것 같으면서 대중적 선동이나 사상에 휩쓸리기 쉬운 위험에 늘 노출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만큼 귀가 엷은 세상에 살고 있고, 믿음에 근거한 자기 생각이 없이 정보의 수집과 활용이라는 방법론적 사고 내지 기계론적 테크놀로지(Technology)의 운용을 잘 알아야 하는 지식에 함몰된 인간성의 부재 현상은 점점 더 물질에 종속된 인간을 배태하기 쉽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스스로 메마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바쁘고 빠르게 돌아가야 생존하고, 물질적 보상이 있는 사회에 영적 가치와 영원한 가치에 대한 생각의 여유가 없이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대두만큼이나 발 빠르지 않으면 세상에 뒤지고 생존에서 도태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위기감이 있다. 혹사라도 이런 위기감이 신자의 마음 어느 한 구석이라도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할 여유가 없어진 현상으로 교회안의 군중이 되어 가는 것은 아닐까?

결국, 하나님의 부재 현상에 대한 반작용으로 뭔가 채워 보려는 기갈이 상징성에 머문 종교행위가 된다면 역시 이기적 종교행위가 될까 두렵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말씀과 인격적인 교제, 하나님을 아는 고상한 지식으로 말미암은 온전한 예배와 신앙 행위는 환경에 의존되지 않는다. 대신 종교적 상징이 인간의 메마름을 채워줄 대체물적 카타르시스 현상인 자기만족으로 그쳐 버리는 신앙행위로 머문다면 이는 큰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교회가 세상에서 빛으로 존재하기 보단, 세상을 비치는 진리등대의 역할보단, 재(Ash) 혹은 불씨만 남은 나무토막과도 같은 존재로 변하기 쉬운 위험에 서 있다. 그만큼 교회가 세상을 섬김에 종교적 상징에 매달린 회색의 무력한 거인으로 만족할 위기가 마치 영화 베트멘(Batman)에 나오는 고담 시대(Gotham city)와 같은 이미지가 연상된다.

요한복음 6장의 오병이어 사건을 보면, 빵 맛을 본 사람들이 그 빵맛의 추억 때문에 예수님을 왕 삼고자 찾아다니는 현상이 있다. 이런 모습이 혹시라도 오늘날의 교회가 상징적 빵맛에 사람들을 길들이게 하진 않았는지, 혹시 이런 빵맛의 유혹을 미끼로 군중을 모으는 행위에 교회 자신도 모르게 길들여 있지 않는지 깊은 묵상에 빠짐은 귀할 것 같다. 혹시 이런 빵 맛이 교회 건물이 갖는 상징, 그 안에 이리저리 형상화된 분위기들이 성도들에게 하늘 양식 보단 상징의 빵 맛에 길들이게 하는 것은 아닌지, 종교적 형상들이 만든 분위기로 성도들을 디베랴 바닷가의 군중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는지, 갈등하여 봄도 귀하리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