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다양한 한인 교파 교회의 설립과 이민 교회의 성격
(1) 조명규 장로의 한인초청 간담회(2011년 8월 19일 한인회관) 발표 내용

애틀랜타 최초의 한인교회는 1970년 1월 셋째 주일에 탄생하였다. 한인들이 300여 명이 있을 때, 에모리 대학 캔들러 교실 겸 강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주로 (신학자인 목사) 학생들이었는데, 에모리 대학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가정 밖에서 교회가 구성된 것은 처음이었다. 교회 이름을 애틀랜타 한인 교회(Korean Church of Atlanta)로 정하고, 문희석 목사가 초대 목사를 맡고, 서기는 남재현(당시는 신학생, 현재 서울 연세대학교 교목 및 교수), 회계는 조명규가 맡았다. 당시에는 교파의 구분 없이 초교파 교회로서 시작하였다. 당시 에모리 대학에는 감리교, 장로교, 성결교, 안식교 목사들이 있었다. 그래서 특정 교파를 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인 교회는 초교파 교회로 시작하였던 것이다. 문희석 목사가 곧 사직하였다. 담임목사는 6개월씩 돌아가면서 맡기로 정하였다. 그래서 조석환(당시에는 학생, 현재 LA에서 목회 후 은퇴)이 담임목사로 취임하였으나, 그분도 6개월을 채우지 못하였다. 1971년 후반에 들어서 한인 인구가 많아지면서 김세희 목사를 3대 목사로 모셨다. 교회 장소를 에모리 대학에서 Peachtree Street에 있는 North Avenue Church로 옮겼다. 교인이 늘게 되자, 김세희 목사는 이 한인 교회를 장로 교회로 하자고 제안하였다. 임원 회의에서 많은 토론을 한 결과, 그냥 초교파 교회로 남기로 가결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1974년 9월 15일 장로 교회가 애틀랜타 한인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독립하였다.

이민 사회에서 이민 교회의 역할은 대단하였다. 교회가 초기 한인 사회 정착에 크게 기여하였다. “초기 이민 사회에서는 미국 이민 생활 10년이면 정신병자가 되어 버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민 정착은 힘들었다. 1970년대에는 한인 이민들이 미국에 정착하는 일은 너무나 어려웠다. 어려운 가운데 이민 교회가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또한 정보 교환 장소로서 많은 기여를 하였다. 예컨대 침례 교회를 처음 세운 문경렬 목사(작고)는 공항에 나가서 한인 이민을 맞이하여 정착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초기 한인 교회는 처음 오는 이민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故 박성용 목사
(2) 박성용 목사의 한인 초청 간담회(2001년 8월 19일 한인회관) 발표 내용
조명규 장로가 초창기의 애틀랜타 한인 교회에 대하여 잘 언급하였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 당시의 교파 교회의 형성 과정에 대한 것과 당시의 목사-신도 관계와 한인 이민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겠다. 애틀랜타 최초의 한인 교회는 에모리 대학에서 문희석 목사가 주도하여 시작하였다. 김세희 목사가 담임목사 일 때, 장로 교회로 하자는 의견과 그대로 한인 교회로 하자는 의견이 일치를 못 보아서 교파 교회인 애틀랜타 장로 교회가 분리되어 만들어졌다.

1970년대 전반에 에모리 대학 신학생들에 의하여 애틀랜타 한인 감리 교회가 출범하는 등 몇 개의 교파가 설립되었다. 그래서 1975년 4월 10일에는 애틀랜타 한인 장로 교회(문경렬 목사), 애틀랜타 장로 교회(김세희 목사), 애틀랜타 한인 감리 교회(김철손 목사), 애틀랜타 한인 교회(전동식 목사), 애틀랜타 한인 안식 교회(임춘택 목사), 그리고 조지아 한인 안식 교회(이한봉 목사) 등 6개의 교회가 설립되어 있었다.

얼마 후에 문경렬 목사가 한국 방문을 마치고 약속대로 돌아오지 못하고 1년 동안을 지체하게 되어, 애틀랜타 한인 장로 교회는 서삼정 목사가 맡게 되었다. 문경렬 목사는 후에 애틀랜타로 돌아와 애틀랜타 한인 장로 교회의 일부 신도들과 함께 조지아 새서울 교회를 설립,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삼정 목사는 애틀랜타 한인 장로 교회의 남은 가정과 함께 제일 장로 교회를 창립하게 되었다. 조지아 새서울 교회는 처음부터 미국 침례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고, 1980년에는 교회 명칭도 공식적으로 조지아 새서울 침례 교회로 바꾸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애틀랜타에는 장로교회, 감리교회, 안식교회, 침례교회 등의 교파 교회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이민교회의 특성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담임목사와 신도 간의 관계 : 담임목사는 신도들의 자녀 교육, 취업, 부부 싸움 문제, 보험 문제 등 이민 사회의 문제를 전부 해결하여 주었다. 이미 사회의 특성상 목사는 이러한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목사와 신도 간에는 가족과 같은 관계가 형성되었다. 사실, 그러한 상황 때문에 목사를 형님이나 오빠로 부를 정도로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민교회와 한국 교회와의 비교 : 한국 교회와는 다르게 이민 교회에는 다양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다. 한국에서는 교인이 아니었던 사람들도 미국에 이민 와서는 한인 이민 교회에 나왔다. 교회의 사정과 형편을 잘 몰라서인지는 몰라도 예배가 끝나면 주차장에 죽 둘러서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한국 교회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한국 교회는 한국 문화에서 굳어진 교회이고, 이민 교회는 미국 문화에서 굳어진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 내부의 문화가 달랐다. 한국 교회가 권위적이라면 이민 교회는 좀 더 민주적인 방향으로 운영되었다.

자체 교회 문제 : 초창기 한인 교회들은 모두 미국 교회를 빌려서 사용하였다. 그런데 한인들은 아이들에게 매우 관용적이라서 애들이 미국 교회에서 말썽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다. 때로는 예배 후에 친교를 나누면서 냄새나는 한국 음식을 마련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문제들로 인하여 미국 교회에서 쫓겨나기도 하였다. 그래서 한인 교회가 몇 번씩 교회당을 옮겨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이민 교회와 미국 사회 : 한인들이 미국 사회에서 사업하면서 어떤 문제가 발생할 경우 교회에 호소해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한 문제 중에서 대표적인 사건은 박상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에 목사가 앞장서서 문제를 풀어야 했다. 예컨대 지형석 목사는 흑인 사회와 한인 사회를 접목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민 교회의 자체 건물 확보 : 서삼정 목사가 교회를 구입하였고, 한인 교회가 자체 교회를 지었고, 한인 연합 장로 교회가 로렌스빌 하이웨이 선상 터커 지역에 교회를 구입하였다. 그 후 다수의 한인 교회가 자체 건물을 확보하기 시작하였다.

이민 교회의 장래 과제 : 이민 1세들이 피땀으로 가꾼 교회를 어떻게 이민 2세에게 물려 주는가 하는 것이 오늘의 과제로 남아있다. 한인 이민 교회가 이민 1세 중심이라면, 결국에는 이민 2세들이 한인 교회를 떠나게 될 것이다. 어떻게 이민 2세들이 한인 교회에 애착을 느껴서 한인의 전통과 문화를 계승할 것인가가 과제로 남아있다.

▲서삼정 목사
(3) 서삼정 목사의 초기 한인 교회 설립에 대한 증언
1972년도에 차남진 박사(후에 LA에서 목회)는 애틀랜타 한인 장로 교회를 창립하여 제1대 담임목사를 담당하였다. 설립 당시에 문경렬 목사, 박형룡 목사, 김화일 목사, 박형관 목사가 이 교회의 협동 목사로 참여하였다. 1973년에 차남진 담임목사가 LA로 떠나게 되자 문경렬 목사가 이 교회의 후임 담임목사가 되었다. 1975년 문경렬 목사가 방문차 한국으로 나갔고, 그 동안 이 교회는 김대기 전도사(현재 애틀랜타 성광 교회 담임목사)가 목회를 맡아 오던 중 1975년 10월경에 서삼정 목사를 이 교회의 설교 목사로 초청하였다.

한국을 방문 중이던 문경렬 목사가 약속 날짜에 돌아오지 못하게 되자, 1975년 연말 제직회에서는 1976년 2월 첫 주일까지 귀국하지 못하면 후임 목사를 정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통보하였다. 이에 문 목사도 교회 결정대로 하기로 약속하였으나 약속 날짜에 돌아오지 않자, 노회에서 파소한 공동 의회 의장 박형룡 목사에 의하여 공동 의회가 개최되어 문 목사와의 관계를 정리하였고, 후임에 서삼정 목사를 청빙하게 되었다. 그 후에 돌아온 문경렬 목사는 일부 성도들과 함께 조지아 새서울 교회를 창립하였고, 서삼정 목사는 남은 성도들(8가정)과 함께 1976년 6월에 애틀랜타 제일 장로 교회를 창립하였다. 조지아 새서울 교회는 1980년경에 공식 명칭을 조지아 새서울 침례교회로 개명하였다.

1975년 당시 애틀랜타에는 애틀랜타 한인 장로 교회, 애틀랜타 장로 교회, 애틀랜타 한인 감리 교회, 애틀랜타 한인 안식 교회, 조지아 한인 안식 교회, 애틀랜타 한인 교회 등 여섯 교회가 있었다. 이와 같이 한인 이민 초기에 애틀랜타에는 안식 교회가 두개나 있었다. 이것은 1970년대 전반기에 애틀랜타 한인 간호원이 많았고, 이 중에 상당수 간호원이 삼육대학 출신이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한국 삼육대학은 안식교 재단이 설립한 학교였기 때문에 삼육대학 출신의 간호원 중에는 안식 교회 신도들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