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남 이승만 박사에 대한 평가는 여러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기독교인 정치가'로서의 이승만 박사다. 그는 초대 대통령으로서 대한민국을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나라로 세우고자 하는 굳은 의지를 갖고 있었다. 이승만 박사의 건국 이념을 다시 살피고 앞으로 자유 통일을 준비하자는 강연이 지난 1월 31일 오전 11시 훼드럴웨이 금란교회(담임 이석주 목사)에서 열렸다.

이승만 박사 워싱턴주 기념사업회가 개최한 강의는 자유포럼대표를 맡고 있는 정창인 박사가 이끌었다. 정 박사는 "독립이 제1의 애국 운동이었다면, 이제 통일을 위한 제2의 애국 운동이 펼쳐져야 할 때"라며 "자유 통일을 위한 운동의 시발점이 시애틀이 되어주길 바란다."는 당부로 강의를 시작했다.

정 박사는 "이승만 박사가 없으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한국은 소련, 미국, 일본이라는 적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소련은 이미 북한을 점령해 한반도를 공산화 하고자하는 야욕을 현실로 옮기고 있었다. 미국은 소련의 정책에 협력하던 때였다. 미국 입장에서 대한민국 건국을 꿈꾸는 이승만 박사는 장애물일 뿐이었다. '자유민주주의국가 대한민국'을 고대하던 이 박사는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통해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은 세가지 건국이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완전독립 △민주 공화국 △기독교 국가였다.

미국은 이미 소련의 신탁통치를 결정했지만 이 박사는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믿고 미국을 찾았다. 또한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서는 미국과 친구가 되어야 함을 알고 교류해나갔다. 정 박사는 "이승만 박사에 대해 분단의 원흉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그것은 김일성이 이 박사를 매도하기 위한 선전에 불과하다."며 "이승만 박사는 공산주의를 배척해 반공의 이념 위에서 대한민국을 건국했다."고 설명했다.

이승만 박사는 이와 함께 '나라의 주인은 고관이 아닌 백성'이라는 신념을 갖고 국정을 이끌어나가고자 했다. 나라의 발전을 위해 국민 각자가 교육을 받아야 함을 강조했다.

평소 굳은 믿음을 갖고 있던 이 박사는 기독교 이념 위에 대한민국을 설립하기를 원했다. 정창인 박사는 "서정주 시인, 올리버 박사 등이 쓴 이승만 박사의 전기들이 있지만, 그의 영혼이 빠진 다큐멘터리와 같다."며 "이 박사 영혼의 뿌리는 성경에 있으며, 그가 기독교 신자라는 것이 간과된다면 껍데기와 같다."고 말했다.

1890년 경 감옥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고 30여명의 양반을 감옥 안에서 전도할만큼 열정적이었던 그는 한국에 기독교와 기독교 교육을 전파하는데 일생을 바칠 것을 다짐했다. 1919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1차 한인대회(The First Korean Congress)’에서 "대한민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겠다."고 선포한 그는 국가 예조를 기독교 바탕으로 만들었다.

그는 이렇게 이승만 박사의 건국 이념을 재조명하고 "이제 우리가 평화 통일을 논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그동안 대한민국은 성장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통일에 대해 소극적으로 논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은 애초부터 '통일'을 강조했지만 그것은 사상전을 전략으로 한 '적화통일'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친북 좌파, 반역 세력이 언론을 장악해 적화통일이 진정한 통일인 양 호도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정 박사는 "통일하는데 막대한 비용이 든다고 말하는 데 그것은 통일 후 결실을 거둘 '투자'이지, 사라지는 비용이 아니"라고 덧붙였다.

한편 강의 후 이승만 박사 워싱턴주 기념사업회는 이승만 박사의 기념관 설립을 위한 시드머니 마련을 위해 '1인 1불 헌납 서명운동'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주완식 목사는 "동포들의 참여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10불, 1백불이 아닌 '1불'운동을 펼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