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1950년대와 1960년대 전반의 한인생활

1891-1893년까지 에모리 대학에서 윤치호 선생이 공부하였다는 기록 이후부터 광복이 될 때까지 한인에 대한 기록을 찾기는 어렵다. 다만 1950년대 에모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던 남기철 목사나 1964년에 애틀랜타에 정착한 안수웅 내과의사 등 애틀랜타에 일직이 거주했던 한인들에 의하면, 광복 이전에 송정률씨와 한인 의사 한 명이 살았다고만 전해지고 있다.

애틀랜타 한인회장을 역임한 바 있는 안수웅 내과의사는 광복이전에 애틀랜타에 선배 의사 한 분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었다고 한다. 안수웅 내과의사는 에모리 대학 의대에 광복 이전에 한인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전한다. 송정률씨는 에모리 대학에서 공부하던 중 6.25전쟁이 발발해 공부를 중단했고, 그 후 서울 감리교 신학대 교수직과 미국 샌프란시스코 한인 감리 교회 목회를 맡은 바 있으며, 지금은 고인이 된 인물이다. 광복이 될 때까지 한인에 대한 기록을 찾기가 힘든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한인들이 미국에 들어오기 어려웠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 감리교의 원로 목사인 이호운 목사와 전종옥 목사가 일찍이 에모리 대학에 유학함으로 에모리 대학과 한국의 감리교와는 각별한 관계를 유지한다. 이에 에모리 대학 레이니 총장은 더욱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다. 1950년 6.25 직후 이호운 목사는 에모리 대학 신학부에 유학하였다. 이호운 목사는 한국 감리교의 원로 목사로 찬송가 355장 ‘부르받아 나선 이 몸’과 493장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을 작사하였고, 대전 감리교 신학대학을 창설하고 초대학장과 이사장을 역임한 바 있다.

그 후 전종옥 목사가 1954-1956년까지 에모리 대학에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하였다. 전종옥 목사는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서 육군 군종감을 거쳐 배재고등학교장을 지냈으며, 현재 은퇴해서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종옥 목사가 떠날 무렵인 1956년에 남기철 목사가 에모리 대학 신학대 석사 과정으로 입학했다.

▲조지아 텍
1950년대 후반의 애틀랜타는 인구가 고작 30-40만명에 불과한 전형적인 남부 도시였다. 당시에 애틀랜타에는 에모리 대학과 조지아 텍에서 공부하던 10명 미만의 한인 유학생이 있었을 뿐이고 다른 한인은 없었다고 전한다. 한국 음식점이나 동양 식품점이 없었기 때문에 다운타운의 딩호를 비롯한 세곳의 중국집(다운타운의 딩호, 10th st. 의 House of Ann, Ponce De Leon의 Young China)은 미국 음식이 싫증나거나 고국이 그리워질 때 유일하게 향수를 달래기 위해 들르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 무렵 에모리 대학의 학생으로 학부생에 이홍구(서울대 교수, 국무총리, 주미대사 등을 역임), 정프랭크, 이성호(김대중 대통령 영부인 이희호 여사의 남동생) 등이 있었으며, 대학원생으로는 이영호(수학 전공), 박순경(신학대, 이화여대 교수 역임), 김성화(하와이에서 목회, 현재는 고인), 남기철(신학대) 목사 등이 있었다. 조지아 텍에도 한두명의 한인 학생이 있었다. 1950년대의 애틀랜타 한인 사회는 한인 유학생이 주축이 된 사회였기 때문에 한인 유학생 사회라고 하는 말이 적절하다 하겠다. 한인 학생들은 학교의 기숙사에서만 주로 생활하였다. 당연히 한인교회도 설립되어 있지 않았다. 자동차를 가지고 있던 한인이 없었고, 한인 학생들은 이동할 때 주로 버스를 타고 다녔다.

남기철 목사는 1958년 귀국했다가 1963년 에모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다시 애틀랜타에 돌아왔는데, 1963년경 애틀랜타에는 한인 유학생뿐만 아니라 몇 명의 한인 이민들도 살고 있었다. 1963년에는 Dr. 정(CDC), 김대식(에모리 대학에서 교육학 전공, UGA, 애틀랜타에서 태권도와 유도 학원 운영, 현재 University of Texas에서 체육학 교수로 재직), 문희석(사이러스문) 등과 다수의 한인 유학생들이 살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본격적인 한인 이민이 나타나기 전이라 한인 이민들의 총수는 많지 않았다.

태권도와 유도를 가르쳤던 김대식씨는 당시 파워가 대단하였다. 경찰들이 주로 그에게 유도를 배웠기 때문에 그는 경찰들과 유대감이 무척 긴밀했다. 그래서 한인들이 교통 신호를 위반하거나 어떤 문제에 부닥칠 때 김대식씨가 경찰에게 전화하면 웬만한 일이면 다 처리가 될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고 한다. 당시 대부분 학생들이 다운타운이나 기숙사에 살고 있었는데, 김대식씨는 도라빌에 주택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자동차도 갖고 있었다. 후에 김대식씨는 연세대 교환 교수로 한국에 가서 지낸 적이 있고 올림픽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디케이터 콜럼비아 신학대학에 재학 중이던 문희석(문사이러스)씨도 당시로서는 드물게 영주하려고 집도 사서 한인 이민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