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부터 13일까지 열린 뉴욕 지역 최대 복음 집회 할렐루야 대회의 강사로 초청됐던 부산 포도원교회 김문훈 목사는 한국에서도 인기 있는 강사로 현재 매 수요일과 목요일 CBS 파워 특강의 진행자로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그런데 이 유명한 목회자는 할렐루야 대회 기간 강단에 설 때마다 "우리 마을에 처음 예수 믿은 분의 가족이 뉴욕에 살고 있다"는 얘기를 빼놓지 않았다.
그래서 본지에서는 2008년 발간된 김진모 장로(뉴욕 겟세마네교회 시무)의 회고록과 김 전 목사(뉴욕대한장로교회)와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 김령 김가의 집성촌이었던 경북 문경 과곡 마을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의 은혜를 입고 아름다운 믿음의 조상으로 살다 간 고 이옹준 집사(음력 1895년 4월 8일-1970년 1월 7일)의 신앙 인생을 조명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영과 육을 치유해 주신 예수님과의 첫 만남
이옹준 집사는 17세에 시집와 22세 때부터 이름 모를 병으로 12년 동안이나 병고를 겪었다고 한다.
그렇게 병약한 몸으로 세 자녀를 낳고 넷째를 임신했을 때 병세가 극도로 나빠져 죽은 목숨처럼 희망 없이 하루하루를 견디던 어느 날, 친정에 온 시댁 딸네 하나가 병문안 차 들러 "우리 시집 동네에도 형님처럼 병명도 모르고 다 죽어가던 사람이 여수(여수하다- 예수 믿다의 뜻)를 하고 고쳤어"라며 예수를 소개했다.
동리나 문중이 허락하겠냐며 손사래를 쳤던 이 집사였지만 "형님도 여수나 한번 해보시지..."하는 음성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고심 끝에 이 집사는 그대로 죽기보다는 예수를 믿어 병이 낫는 것이 자식들의 앞길에 좋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시어머니에게 허락을 받아 친정이 있는 곳의 면 소재지인 한두리 교회를 찾아 가게 된다.
교인들은 이 집사 주위에 둘러 앉아 열심히 기도를 해주었고 이 집사는 눈물을 쏟으며 기도한 후에 기분이 상쾌해지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또 귀찮고 짜증이 나던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며, 뼈마디만 남아 보면 한숨만 나오던 앙상한 손까지도 희망이 있어 보였다고 한다.
그렇게 영과 육을 치유해 주신 예수님과의 첫 만남 이후 가족들이 한 명 한 명 전도되기 시작했다.
가족 전도로 가정 예배 시작
시력이 나빠 나뭇잎사귀를 구분하지 못했던 작은 동서가 교회에 나갔다 시력을 회복해 전도가 됐다. 그리고 한 주라도 빠지면 나은 몸이 다시 병드는 것은 아닌가 해서 둘 중 누구도 교회에 나가지 못할 때는 시어머니가 교회에 나가다 보니 시어머니까지 전도가 됐다.
세 명이 교회에 나가게 됐지만 주일이면 더욱 분주한 시골이라 한 사람만 대표로 교대로 교회에 나갈 수 있으니 교회에 나갈 수 없는 이들의 마음이 너무 괴로웠다. 그래서 차라리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자는 의견이 나왔고 가족들의 합의하에 사랑방에서 가정 예배를 시작하게 됐다.
이 가정 예배에는 주일이면 경북 북부 지역의 교회들로 조직된 경안노회에서 필조씨라는 전도부인이 파송됐다..
문중의 핍박
하지만 불어오는 핍박도 거셌다. 하루는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종조부(시아버지의 동생)가 들이닥쳐 괭이로 사랑방 구들장을 파헤치며 이 집사의 머리채를 쥐어 잡고 "조상도 모르는 이 놈의 야소쟁이, 우리 집안에서 나가라!"며 호통을 쳤다.
종조부는 시아버지에게 며느리를 쫓아내라고 설득하기도 했으며 형님의 집에서는 이제 제사를 드리지 않을 것이니 제답(수확을 제사 따위에 쓰려고 마련한 논) 조로 땅 한 필을 자신의 큰 아들에게 주라고 했다.
가족들은 제사를 지내라고 땅을 주는 것은 제사를 지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니 땅을 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종조부는 자신이 알아서 처리한다며 당시 이장 일을 보며 갖고 있던 형님의 도장으로 땅 한 필을 제답으로 조카에게 양도한다는 서류를 만들어 몇 년 후 이 집사의 남편이었던 고 김인규 집사는 옥살이를 하게 된다.
동네의 핍박
한편 문중의 핍박 뿐 아니라 동네의 핍박도 피할 수 없었다. 해마다 동신제(동민들이 마을신에게 연중 무병과 풍년을 비는 제사)에 쓸 쌀이나 콩, 팥 등을 집집마다 돌며 걷는 연초가 되면 이 집사의 집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마당을 빙빙 돌며 징과 꽹과리를 쳐대며 제사에 쓸 곡식을 얻어가려는 이들에게 "아무리 그래도 우상 숭배하는 일에는 조금도 보탤 수 없으니 헛수고 그만들 하소"하는 서슬 퍼런 김 집사에게 소리꾼들은 입마다 한 마디씩 욕을 퍼부으며 "이 놈의 집에 불을 확 질러 버리겠다"며 침을 뱉으며 나가기 일쑤였다.
핍박의 열매
그러나 한 알이 밀알이 떨어져 죽을 때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했듯 핍박의 열매는 아름답게 맺혔다.
이 집사의 남편인 고 김인규 집사를 따라 시동생 둘까지 주님 앞으로 나와 1930년 언덕배기 텃밭에는 과곡교회 예배당이 지어졌다. 그리고 막내 시동생은 예배당 옆에 집을 사서 예배 때면 종을 치는 사찰 집사로 수고했다.
또한 예배당 언덕 너머에 사는 다른 성을 가진 세 집 '덕칠네'라 불렸던 점쟁이 할머니, '점백이'라 불렸던 하인 그리고 엄명구 선생이라는 이들이 교회의 성도가 됐다.
그러다 1930년대 말에는 이 집사가 처음 주님을 만났던 산북의 한두리교회가 일제의 탄압으로 문을 닫고 산양면과 산북면 내의 성도들은 모두 과곡교회로 모여 왔다.
그때까지 필조 전도부인을 시작으로 10명의 교역자들이 과곡교회를 거쳐 갔다. 하지만 교역자가 없을 때가 잦아 작은 시동생이 영수(집사와 장로 직분의 중간 직분)로 단을 지킬 때가 많았다고 한다.
1937. 1938년에는 과곡. 현리. 산양. 마네. 산북. 서중에서 장년과 유년을 합해 50명이 훌쩍 넘는 이들이 과곡교회에 출석했다.
해방 이후 이들은 각자 자기 동네에 교회를 세워 산양에 산양교회, 산북에 서중교회, 점촌에 중앙교회, 현리에 현리교회, 문경에 북문교회가 세워졌다.
이 집사 한 사람을 통해 과곡교회를 포함한 고신 측 다섯 교회와 합동 측 한 교회 모두 여섯 교회가 설립된 것이다.
현재 과곡교회에는 이 집사의 작은 시동생 아들인 김 준 장로가 시무하고 있다.
자녀들을 주의 종으로 세우고자
또한 이 집사는 자녀들을 주의 종으로 세우고자 먼저는 맏아들이었던 김진태 장로를 대구성경학교에 보낸다. 후에 김 장로는 일제의 탄압으로 없어진 한두리 산북교회를 재건하고 서중교회를 세워 영수로 두 교회를 인도했다.
이어 김 전 목사를 고려신학교에 보낸다. 이 집사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해방을 주신 것은 이 땅의 복음 전도를 위한 것이니 불타고 없어질 육신의 사업보다는 복음 전도가 급한 일이다"며 당시 이발소를 운영하던 아들을 신학교로 보냈다.
마지막으로 이 집사는 형과 아우를 대신해 집안의 농사일을 맡고 있던 김진모 장로까지 서울 삼열신학원에 입학하게 한다.
농사를 아버지에게 혼자 하시게 두고 어떻게 떠나냐는 아들에게 이 집사는 "쟁기를 잡은 자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며 아들을 떠나보냈다.
그렇게 이 집사의 신앙을 이어 받은 믿음의 후손들이 현재 86명으로 목사, 권사, 사모, 장로, 전도사, 집사 등으로 헌신하며 미국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이 유명한 목회자는 할렐루야 대회 기간 강단에 설 때마다 "우리 마을에 처음 예수 믿은 분의 가족이 뉴욕에 살고 있다"는 얘기를 빼놓지 않았다.
그래서 본지에서는 2008년 발간된 김진모 장로(뉴욕 겟세마네교회 시무)의 회고록과 김 전 목사(뉴욕대한장로교회)와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 김령 김가의 집성촌이었던 경북 문경 과곡 마을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의 은혜를 입고 아름다운 믿음의 조상으로 살다 간 고 이옹준 집사(음력 1895년 4월 8일-1970년 1월 7일)의 신앙 인생을 조명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영과 육을 치유해 주신 예수님과의 첫 만남
이옹준 집사는 17세에 시집와 22세 때부터 이름 모를 병으로 12년 동안이나 병고를 겪었다고 한다.
그렇게 병약한 몸으로 세 자녀를 낳고 넷째를 임신했을 때 병세가 극도로 나빠져 죽은 목숨처럼 희망 없이 하루하루를 견디던 어느 날, 친정에 온 시댁 딸네 하나가 병문안 차 들러 "우리 시집 동네에도 형님처럼 병명도 모르고 다 죽어가던 사람이 여수(여수하다- 예수 믿다의 뜻)를 하고 고쳤어"라며 예수를 소개했다.
동리나 문중이 허락하겠냐며 손사래를 쳤던 이 집사였지만 "형님도 여수나 한번 해보시지..."하는 음성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고심 끝에 이 집사는 그대로 죽기보다는 예수를 믿어 병이 낫는 것이 자식들의 앞길에 좋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시어머니에게 허락을 받아 친정이 있는 곳의 면 소재지인 한두리 교회를 찾아 가게 된다.
교인들은 이 집사 주위에 둘러 앉아 열심히 기도를 해주었고 이 집사는 눈물을 쏟으며 기도한 후에 기분이 상쾌해지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또 귀찮고 짜증이 나던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며, 뼈마디만 남아 보면 한숨만 나오던 앙상한 손까지도 희망이 있어 보였다고 한다.
그렇게 영과 육을 치유해 주신 예수님과의 첫 만남 이후 가족들이 한 명 한 명 전도되기 시작했다.
가족 전도로 가정 예배 시작
시력이 나빠 나뭇잎사귀를 구분하지 못했던 작은 동서가 교회에 나갔다 시력을 회복해 전도가 됐다. 그리고 한 주라도 빠지면 나은 몸이 다시 병드는 것은 아닌가 해서 둘 중 누구도 교회에 나가지 못할 때는 시어머니가 교회에 나가다 보니 시어머니까지 전도가 됐다.
세 명이 교회에 나가게 됐지만 주일이면 더욱 분주한 시골이라 한 사람만 대표로 교대로 교회에 나갈 수 있으니 교회에 나갈 수 없는 이들의 마음이 너무 괴로웠다. 그래서 차라리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자는 의견이 나왔고 가족들의 합의하에 사랑방에서 가정 예배를 시작하게 됐다.
이 가정 예배에는 주일이면 경북 북부 지역의 교회들로 조직된 경안노회에서 필조씨라는 전도부인이 파송됐다..
문중의 핍박
하지만 불어오는 핍박도 거셌다. 하루는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종조부(시아버지의 동생)가 들이닥쳐 괭이로 사랑방 구들장을 파헤치며 이 집사의 머리채를 쥐어 잡고 "조상도 모르는 이 놈의 야소쟁이, 우리 집안에서 나가라!"며 호통을 쳤다.
종조부는 시아버지에게 며느리를 쫓아내라고 설득하기도 했으며 형님의 집에서는 이제 제사를 드리지 않을 것이니 제답(수확을 제사 따위에 쓰려고 마련한 논) 조로 땅 한 필을 자신의 큰 아들에게 주라고 했다.
가족들은 제사를 지내라고 땅을 주는 것은 제사를 지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니 땅을 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종조부는 자신이 알아서 처리한다며 당시 이장 일을 보며 갖고 있던 형님의 도장으로 땅 한 필을 제답으로 조카에게 양도한다는 서류를 만들어 몇 년 후 이 집사의 남편이었던 고 김인규 집사는 옥살이를 하게 된다.
동네의 핍박
한편 문중의 핍박 뿐 아니라 동네의 핍박도 피할 수 없었다. 해마다 동신제(동민들이 마을신에게 연중 무병과 풍년을 비는 제사)에 쓸 쌀이나 콩, 팥 등을 집집마다 돌며 걷는 연초가 되면 이 집사의 집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마당을 빙빙 돌며 징과 꽹과리를 쳐대며 제사에 쓸 곡식을 얻어가려는 이들에게 "아무리 그래도 우상 숭배하는 일에는 조금도 보탤 수 없으니 헛수고 그만들 하소"하는 서슬 퍼런 김 집사에게 소리꾼들은 입마다 한 마디씩 욕을 퍼부으며 "이 놈의 집에 불을 확 질러 버리겠다"며 침을 뱉으며 나가기 일쑤였다.
핍박의 열매
그러나 한 알이 밀알이 떨어져 죽을 때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했듯 핍박의 열매는 아름답게 맺혔다.
이 집사의 남편인 고 김인규 집사를 따라 시동생 둘까지 주님 앞으로 나와 1930년 언덕배기 텃밭에는 과곡교회 예배당이 지어졌다. 그리고 막내 시동생은 예배당 옆에 집을 사서 예배 때면 종을 치는 사찰 집사로 수고했다.
또한 예배당 언덕 너머에 사는 다른 성을 가진 세 집 '덕칠네'라 불렸던 점쟁이 할머니, '점백이'라 불렸던 하인 그리고 엄명구 선생이라는 이들이 교회의 성도가 됐다.
그러다 1930년대 말에는 이 집사가 처음 주님을 만났던 산북의 한두리교회가 일제의 탄압으로 문을 닫고 산양면과 산북면 내의 성도들은 모두 과곡교회로 모여 왔다.
그때까지 필조 전도부인을 시작으로 10명의 교역자들이 과곡교회를 거쳐 갔다. 하지만 교역자가 없을 때가 잦아 작은 시동생이 영수(집사와 장로 직분의 중간 직분)로 단을 지킬 때가 많았다고 한다.
1937. 1938년에는 과곡. 현리. 산양. 마네. 산북. 서중에서 장년과 유년을 합해 50명이 훌쩍 넘는 이들이 과곡교회에 출석했다.
해방 이후 이들은 각자 자기 동네에 교회를 세워 산양에 산양교회, 산북에 서중교회, 점촌에 중앙교회, 현리에 현리교회, 문경에 북문교회가 세워졌다.
이 집사 한 사람을 통해 과곡교회를 포함한 고신 측 다섯 교회와 합동 측 한 교회 모두 여섯 교회가 설립된 것이다.
현재 과곡교회에는 이 집사의 작은 시동생 아들인 김 준 장로가 시무하고 있다.
자녀들을 주의 종으로 세우고자
또한 이 집사는 자녀들을 주의 종으로 세우고자 먼저는 맏아들이었던 김진태 장로를 대구성경학교에 보낸다. 후에 김 장로는 일제의 탄압으로 없어진 한두리 산북교회를 재건하고 서중교회를 세워 영수로 두 교회를 인도했다.
이어 김 전 목사를 고려신학교에 보낸다. 이 집사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해방을 주신 것은 이 땅의 복음 전도를 위한 것이니 불타고 없어질 육신의 사업보다는 복음 전도가 급한 일이다"며 당시 이발소를 운영하던 아들을 신학교로 보냈다.
마지막으로 이 집사는 형과 아우를 대신해 집안의 농사일을 맡고 있던 김진모 장로까지 서울 삼열신학원에 입학하게 한다.
농사를 아버지에게 혼자 하시게 두고 어떻게 떠나냐는 아들에게 이 집사는 "쟁기를 잡은 자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며 아들을 떠나보냈다.
그렇게 이 집사의 신앙을 이어 받은 믿음의 후손들이 현재 86명으로 목사, 권사, 사모, 장로, 전도사, 집사 등으로 헌신하며 미국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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