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물가상승과 불경기의 여파로 한인사회에도 예외없이 직격탄을 맞고 있습니다. 옛날에야 가난했으니까 불편해도 당연한 것처럼 현실을 맞이하였지만, 지금은 우리의 편리해진 생활습관과 높은 생계비용이 불편함을 용납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것 같습니다.

최근 북가주 한인사회에서는 낙찰계 파동으로 성실하게 살던 분이 자살한 경우도 있고, 부득불 사업을 접어야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 중에는 가정이 깨어진 경우도 있고, 도피하신 분도 있습니다. 얼마나 좋은 목적과 동기로 시작을 하였겠습니까? 하지만 불경기의 여파로, 또는 약속을 파기한 사람으로 인하여 돈도 잃고, 친분도 잃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요즘의 낙찰계는 욕심의 결과인 듯 싶습니다.

계 문제와는 다르지만 또다른 심각한 문제가 한인사회와 교회에 발생하고 있습니다. 일명 “다단계” 또는 “피라밋 판매방식”이 그것이며, “네트워크”의 이름으로 여러 형태의 판매사업이 선보이고 있습니다. 사실, 이름이 다르고, 겉의 방식이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근본적으로 뿌리가 같은 판매방법입니다. 그 가운데는 목회자와 사모, 많은 성도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 사업의 특징은 첫째, 절대 사기가 아니며, 둘째, 필요한 물건이 많은데 구입만 해도 손해 될 것이 없다는 것이며, 셋째, 어느 정도만 투자하거나 회원가입이 되면 가만히 있어도 수익금이 늘어나며, 넷째, 돈을 버는 목적은 “서로 나눔”, “선교”와 “은퇴 후 생활보장” 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업의 방법은 성경적인 전도와 똑같은 방법으로 사업에 적용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친한 목사님의 강권으로 어느 정도의 물건을 구입하면서 ‘포인트’를 올리기 위해 저에게는 적지 않은 돈을 그분의 얼굴을 봐서 투자한 적이 있습니다. 수시로 포인트가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딱 한번 300불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몇달 후, 그 회사의 사장은 도피하였고, 그 목사님은 또다른 이름의 다단계 회사의 주요사원으로 사람들을 포섭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의 투자금액은 허공으로 날아갔고, 그 목사님은 선심을 쓰는양 이름도 없는 샴푸, 화장품 몇 박스로 대신 가져왔다며 비싸고 고급스러운 것이므로 절대 손해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위로(?)하였습니다.

이 사업의 부당성을 비 전문가지만 논해보겠습니다. 첫째는 경제산업의 활성화보다는 일확천금이나 허황된 비전을 준다는 것입니다. 경제산업의 발달은 투자를 통한 상품개발, 이로인한 생활의 편리함과 정당한 수익입니다. 그러나 위의 판매방식은 상품투자나 계발보다는 사람 머리수가 수입과 직결됨으로 물건 판매가 주목적이 아니라 사람을 포섭하는 것이 급선무가 됩니다. 이는 거시적으로 경제활성화를 가로막을 뿐 아니라, 게으른 부자로 만드는 허황된 꿈만 키우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심각한 중독현상입니다. 포인트를 올리기 위하여 사람이 채워지지 않으면 물건을 과하게 사는 중독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사는 경우가 허다하며, 주식중독처럼 일하며 얻는 노동의 댓가보다는 어떻게 포인트를 더 올릴까하는 욕심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선교비 마련’이라는 목적아래… 하나님은 이런 선교비를 절대 기뻐하시지 않으리라 봅니다.

셋째는 비성경적이라는 것입니다. 제자훈련을 받으면서 한 가지 잘못 배운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들면 그 제자를 통해 기하급수적으로 수가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12 제자를 통해 세계선교가 이루어진 것은 분명히 맞지만 그 방법은 “말씀”과 “성령”의 절대적인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결코 몇명의 제자가 키우기만 하면 수 십,수백 명의 사람을 전도하고 부흥할 수 있다는 인간적인 산술이 아니었습니다.

수가성의 여인이 변화되어 마을을 전도했고, 장애인이 치유받음으로 체험되었던 예수를 증거함으로 전도가 이루어졌습니다. “말씀”과 “성령”의 인격적 터치와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자들의 체험과 삶이 입으로, 생활로 전도되어 교회에 인도됨으로 얻어진 것이지 “총동원주일” 몇 번 했다고, “전도왕 한 사람” 때문에, 탁월한 리더(물론 부분적으로 맞지만) 한 사람때문에 하나님나라가 전파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전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방법을 기울인 것에 대해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일당을 주면서까지 대여한 버스에 실어 교회로 인도하는 그런 전도방법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하는 의문이 들곤 합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이 일에 뛰어들고 있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목회’가 안 되거나, 목회를 하지 않는 목사들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회원이 확보되면 한달에 만불, 이만불을 쉽게 벌수 있다는 말에 현혹되어 뛰어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그러한 위치에 올라가기 위해 가족이던,친지던, 성도건, 목회자건 상관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높은 수익자가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의 회원을 만들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 역시 장애선교사역을 하면서 이렇게 고수익만 된다면, 더욱이 절대 강요나 사기가 아니라는데, 나와 나의 가족들에게 큰 유익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정말 귀가 솔깃한 이야기였습니다. 개인보험도 들 수 없고, 은퇴 후에는 막막한 사역이기에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 연금타는 것보다 더 안정된다고 하니 이만한 유혹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선한 목적으로 돈을 벌고자 하는 착한 성도님들의 마음을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뇌리 속에 남아있는 한 폭의 그림이 하나님의 메세지임을 발견합니다. 바로 “이삭줍기”와 “만종”이라는 그림입니다. 불세출의 프랑스 화가 밀레의 그림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가난한 농민을 주제로 “소박하고 경건한 삶”을 화폭으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가난하지만 성실하게 땀을 흘리며 이삭을 줍고 있습니다. 누구의 것을 탐내지도, 욕심을 내어 쓸어담지도 않습니다. 힘든 노동에 비해 아주 작은 댓가이지만 한날을 감사하며 기도하는 부부의 모습 속에 하나님이 주신 소박한 행복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선한 일을 위해 ‘깨끗한 부자’를 꿈꾸는 성도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기도 합니다. 동시에 불경기로 인하여 어려움이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선교의 비전을 위해 부자가 되어야 하는 것보다, 노후를 위한 준비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적은 생계비에도, 수입이 줄어든 나의 생업 속에서도, 좀 불편하고 힘들어도, 감사와 만족의 비결, 인내 속에서 행복의 노래를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