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철이형.......
호철이 형님......
호철이 오빠.......
호철이 아저씨........
호철이씨..........
호철이 형제.........
호철이삼촌.........
호철아.....

호철아 내 아들아.... 살아야한다........(김 씨의 고백)

이호철(40세) 씨. 그가 캐나다를 거쳐 미국에 밀입국한 것은 8년 전 2000년의 일이다. 깨어진 가정에서 자라 불행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던 그가 새로운 삶을 꿈꾸며 미국에 왔건만, 적응의 어려움이었는지 군대시절 오토바이 사고로 인한 뇌손상이었는지 덜컥 뇌출혈로 쓰러져 정신지체자가 되고 말았다. 차츰 기억들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해 일하는 것조차 문제가 생겼을 2004년 어느 날 그는 웨체스터에 있는 김 씨의 가게를 찾아왔다. 그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만남은 어느 사랑이야기보다 더 눈물 나게 한다.

불법체류자 신분이었던 김 씨는 신문의 광고를 보고 찾아왔다는 호철씨를 보자 자기보다 딱한 그를 돕기로 결심했다. 그에게 일자리를 주며 그와 살며 보살펴주기로 한 것이다. 이호철씨는 이미 LA에서 교회를 다니며 세례도 받았기에 자연스럽게 김 씨는 그가 다니고 있었던 웨체스터 소망교회(담임 성현경 목사)로 인도했다.

그러던 중 교회가 웨체스터에서 허드슨 강 건너로 이사를 오게 되었고, 김 씨는 직장 때문에 뉴저지로 오지 못했지만 이 씨가 먼저 뉴저지로 오게 됐다. 이 씨는 얼마 안 되는 기간이지만 스스로 취직해 일도 했다. 그러나 정신의 문제가 있는 그를 원하는 곳은 없었다. 길이 없는 상황에서 한 교회에서 취업과 생활을 도와주게 돼 그 교회로 옮기게 됐다.

이후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이 씨는 팰리세이드팍에서 버겐필드에 위치한 가스펠 펠로우쉽교회까지 밤에 걸어왔다. 그 날은 마침 특별기도회를 하고 있었기에 모두 교회에 있었기에 이 씨를 반갑게 맞이했으며, 그 사이 뉴저지로 이사 온 김 씨와 다시 살게 됐다.

김 씨는 일하는 곳에 이 씨와 같이 고용해달라고 요청하며 이 씨의 몫까지 일하며 그를 섬겼다. 그런데 이 씨의 상태는 더욱 악화돼 갔다. 식기를 씻는 트리오로 초록색 밥을 만들었고, 빨래 해준 옷을 입지 않고 더러운 옷을 입을 뿐 아니라 집 열쇠를 잃어버리기 다수였으며, 가스렌지에 음식을 태워 911이 출동하기도 했다. 급기야 벽에 변을 바르고 반발까지 해댔다.

더 이상 김 씨가 이호철 씨를 돌보기 힘들어 하던 중 2006년 8월에 갑작스럽게 그는 집을 나갔다. 잉글우드 병원에 자원 봉사하러 간 가스펠 펠로우쉽 교인을 통해 그를 만난 것은 40여일 뒤. 며칠 뒤 파라무스에 있는 'Bergen Gegional Medical Center'로 옮겨 진료를 받게 됐다. 2007년 1월에 갑작스럽게 Hackensack Hospital로 옮기기도 했으나 다시 버겐 리저널 메니컬 센터는 정신 지체로 말도 제대로 못하고 대소변도 가라지 못해 행동장애로 분류된 그를 계속 돌봤다. 또한 가스펠 펠로우쉽 성도들이 매일 낮과 저녁으로 순번을 정해 병원에 가 그를 돌보며 식사를 떠 넣어 주었다.

가스펠 펠로우쉽 교회 성현경 목사는 "그 친구를 처음 만났을 때 학교도 보내고 여러 곳에 취직도 시켜봤지만 머리가 망가지니 의자에 앉기도 힘들고, 왼손으로 연필을 든 채 오른손으로 글씨 쓰는 흉내를 내는 등 자기 이름도 쓰기 힘들었다. 한 달 지나면 쫓겨나고, 보름 있다가 쫓겨나더니 나중에는 일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며 "집을 나간 그를 병원에서 찾은 뒤 여권까지 잃어버렸던 그를 돕기 위해 영사관에 알렸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한국에 알아봐 호적등본을 떼었는데 친척의 보증이 없이 여권을 만들어 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엄연히 한국 사람인데도 본인 확인이 안 된다는 이유로. 치료비는 쌓여 가는데, 미국의 체류신분도 한국 여권도 없어 어려움들이 많았다"고 언급한다.

이를 위해 재판도 여러 번 했다. 결국 버겐카운티에서 무상으로 치료를 해 줬으며, 크리스천이었던 영사관 직원들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여권을 발급받았음은 물론, 복지부 장관까지 허락을 받아 재외동포차원에서 그를 한국으로 옮기기로 결정이 나게 됐다. 한국내 연고자를 찾았지만, 그들도 어려운 형편이라 정부에서 모든 비용을 대 이 씨와 그를 돌봤던 버겐 리저널 메디컬 센터의 주치의 그랜트 노먼 고 전문의와 조셉 주니어 간병인이 그와 함께 지난 1월 31일 한국 충복 음성의 꽃동네로 떠났다.

성 목사는 "호철형제가 떠나기로 결정되며 마지막으로 면회를 갔을 때 비틀거리며 마시던 쥬스를 팔등으로 김 씨에게 밀어주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마지막으로 김 씨와 전화 통화를 하게 했는데, 말도 못하는데 사랑의 표시를 하고 싶어서 부르르 떠는 모습에 눈물이 났다"며 "아버지를 그렇게 미워했던 호철형제가 기도만 하면 울면서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곤 했는데, 한국에서 아버지와 여동생이 공항에 마중 나온다고 들었다. 그를 돌보며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됐다. 그를 돌보며 힘듦도 있었지만 큰 기쁨이었다. 한국에서 잘 살았으면 좋겠다"며 눈시울을 붉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