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용어 남발, 기도회·예식·경건회 등으로 구분을
설교에 대한 맹종과 복종, 심각한 부작용 불러일으켜
받은 메시지 실천했을 때 진리 꽃피고 믿음 견고해져
“천주교에서는 새신자 교육에 있어 예배자로서의 기본을 갖추게 하는 교육을 가장 우선시합니다. 그래서 천주교인들은 어떤 감언이설의 이단이 출현해도 좀처럼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개신교는 올바른 예배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에 언제 어디서나 찬송과 기도와 설교만 있으면 그것을 예배라고 믿고 따릅니다. 목사가 설교시간에 무슨 말을 해도 그것이 하나님 말씀의 대언이라고 받아들이고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평생 한국교회 예배·설교 분야에서 목회자와 신학생들을 가르쳤던 정장복 교수(한일장신대 명예총장)가 평신도를 위해 예배·설교 분야를 집대성한 <알고 드리는 예배 알고 듣는 설교>를 펴냈다.
평신도들을 위해 4년간 기고했던 글들을 묶어 낸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예배의 기본 원리부터 예배의 역사와 실천, 핵심과 결과와 요소 등 예배에 대한 내용들과 설교를 듣는 이들을 위한 자세부터 소망까지 평신도가 알아야 할 다양한 내용들을 망라하고 있다.
먼저 ‘예배’의 정의부터.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라는 용어를 남발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각종 모임에 ‘예배’라는 이름을 붙인다. 수요예배, 새벽예배, 금요예배, 위임예배, 임직예배, 돌예배, 생일예배, 결혼예배, 회갑예배, 임종예배, 입관예배, 장례예배, 위로예배, 심방예배, 기공예배, 준공예배, 축하예배 등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이는 기독교의 전통을 이어온 다른 나라에서 들어보기 매우 힘든 표현들이다. 특별히 영어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표현이다.”
저자는 이러한 기이한 현상의 원인을 세 가지로 요약했다. ①한반도에 일찍부터 자리잡은 재래종교들이 어디서나 공통적으로 복을 비는 행위가 기독교의 예배와 분리되지 않고 있는 현상이다 ②교회마다 전무(全無)한 예배학 교육이 한 세기가 다 되어서야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③우리말 성경에서 예배라는 용어를 올바르게 번역하지 않아 성경에 나타난 예배의 정신과 존엄성을 올바로 깨닫지 못한 이유 때문이다.
대안도 제시했다. ①‘예배’는 주일예배와 주일 찬양예배를 지칭하고, 특수한 경우 추수감사예배, 3.1절 기념 감사예배로 부른다 ②그 외 교회가 함께하는 모임은 새벽기도회, 수요기도회, 금요(심야)기도회라 한다 ③교인들의 가정을 위한 모임에는 심방기도회, 돌(생일) 감사기도회, 위로기도회 등으로 일컫는다 ④기타 모임으로 위임, 임직, 결혼, 회갑, 임종, 입관, 장례, 기공, 준공, 기타 축하행사 등은 ‘예식’으로 부른다 ⑤교회 각종 회의 전 갖는 기도회는 ‘경건회’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예배 우등생들(True Worshipers)’이 품어야 할 7개 항목으로는 ①인생 최우선 목적을 예배에 두라 ②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한 주님의 날에 예배하는 일이 최우선이다 ③교만한 바리새인의 자세를 버리고 죄인 된 몸으로 자기 결핍을 인정하고 임하라 ④예배에서 경청하는 말씀으로 하나님을 뵙고 영혼이 강건해지는 건실한 신앙의 뿌리를 내리라 ⑤성찬성례전을 월 1회 이상 갖도록 하라 ⑥온라인 예배를 즐기지 마라 ⑦공적 주일예배와 일반 집회를 구분해 드리라 등을 꼽았다.
설교에 대해선 ‘생각하는 설교 파트너’가 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이전까지 선포되는 말씀에 대한 무조건적 순종을 알게 모르게 강요당하며 살아왔다면, 이제는 올바르게 경청하고 헤아리고 수용하고 실천하는 ‘설교의 파트너’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맹종의 자세가 일시적으로는 설교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교회의 평화를 위해 필요할지 모르나, 때로는 그러한 맹종이나 복종이 심각한 부작용을 불러일으켰다. 무분별한 ‘순종’이 지속되는 동안 회중의 인지능력은 저하됐고, 이곳저곳에서 이단이 속출하는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이제 설교자는 회중을 설교의 파트너로 존중하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는 ‘정직한 설교’를 해야 할 때가 다가왔다.”
설교에도 비타민 A·B·C·D처럼 ‘종류’가 있다고도 말한다. 예수님의 오심과 생애와 교훈, 수난과 부활, 승천과 재림을 ‘선포하는 설교’, 알고 실천해야 할 ‘교훈을 목적으로 하는 설교’, 회중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복 받는 길을 제시하는 ‘목양 설교’, 개인과 사회의 부조리와 죄악을 파헤치면서 회개를 촉구하는 ‘예언적 설교’ 등이다.
이를 비타민 A-D로 비유한 이유는, 한 가지만 섭취할 경우 건강에 이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경고이다. “설교는 회중을 바라보고 그들의 취향에 맞는 메시지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적절한 메시지를 때와 환경에 따라 전해야 한다. … 회중은 하나님 말씀이 설교를 통해 들려올 때, 그것이 쓰든 달든 의무적으로 받아먹어야 건강한 영육을 영위할 수 있다.”
평신도들이 ‘설교의 파트너’인 이유는, 설교의 완성이 그 설교의 ‘실천’에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직면한 문제는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수많은 설교를 매주 듣지만, 그 메시지들이 ‘행함이 없는 메시지’로 사라진다는 점이다. 그럴 때 설교는 미완성의 메아리로 끝이 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받은 메시지를 실천으로 현장화했을 때 그 진리가 꽃이 피고 믿음은 더욱 견고해진다.”
나아가 평신도들이 강단에서 외치는 설교가 과연 하나님 말씀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실력을 키울 것을 촉구하고 있다. 진실한 말씀 앞에는 아낌없는 감사와 찬사의 반응을 보이는 동시에, 지적해야 할 부분은 냉정하게 건의를 해야 한다는 것.
“설교는 설교자 단독으로 이뤄지는 사역이 아니다. 평신도라는 설교의 동반자가 함께 노력하고 기도할 때 설교는 하나님의 진리가 소통되는 도구의 구실을 하게 된다. 명심하자. 설교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 교회는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고 진리의 말씀을 받아먹고 사는 공동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