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제부터인가 "까칠하다"는 표현이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인터넷이 발달되고 자기표현이 왕성해지고 익명으로 인터넷에 마구 글을 올리게 되면서 대담하고도 도발적인 표현을 거침없이 하는 그런 세태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어떤 상황에 대해 자기 의견을 댓글로 표현하는 문화가 발달하자 점점 그 reaction이 거칠어지고, 까칠하고 무례하기까지 한 것이 이제는 그 도가 지나칠 정도입니다.
며칠 전 한국에서 프로 축구 2군 경기에 출전했던 안정환 선수에게 지나치다 못해 모욕적인 발언까지 거침없이 표현하는 관중을 향해 안 정환선수가 개인적인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관중석으로 올라가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곧바로 안 선수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제지당해 다행히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충돌은 없었지만 안 선수는 바로 심판에 의해 퇴장 당하고 말았고 경기는 지지부진한 채 매듭을 짓고 말았습니다.
그 사건 자체가 너무나도 치졸하고 일방적인 인신공격으로 말미암은 것이어서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입니다. 인터넷에 소개된 동영상을 통해 본 몇몇 관중의 안정환 선수에 대한 야유는 그 도를 지나쳐서 선수를 격려하는 것은 고사하고 아예 분노를 자극해서 선수로 하여금 도저히 경기를 진행할 수 없을 정도의 발언이었습니다.
물론 프로선수가 그러한 관중의 발언을 무시하고 경기에 전념하였더라면 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발언 가운데는 안정환 선수가 한참 전성기 때의 행동을 비열하게 묘사하고, 그가 받는 급료나 보상금까지도 운운하면서 모욕감을 주는 발언이었기에 그 도가 지나쳤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학력위조 사건으로 언론과 국민들의 집중 화살을 맞았던 신정아씨에 얽힌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의 모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그녀의 심경토로는 뉘우치는 것보다는 분노에 가까운 발언을 하였던 것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5만 번도 더 뚜껑이 열려 억울해 못 죽겠다"는 그녀의 직접적인 표현은 이러한 "까칠한 마음"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공인의 입장을 취하지 않게 하고 오히려 "억울해서 죽을 수 없다"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하게
했을까?
그뿐이 아닙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23명의 선교단이 탈레반에 의해 납치되었다 2명은 순교하고 21명이 마침내 귀환한 사태에서도 똑같이 "까칠한" 상황이 발생하였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소위 "안티 기독교인"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의 지독한 비난의 화살은 그 화살을 직접 받는 교계의 관계자로 하여금 당황하게 만들고 이러한 사람들의 표현에 대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때로 격한 마음에 분노와 반발의 반응을 보이게끔 하고 있습니다.
왜 이러한 인신공격성의 발언들이 요즘 우리 한국에서 발발하고 있을까?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왜 이렇게 비난의 화살을 무차별할 정도로 퍼붓는 세태가 되고 말았을까? 왜 시기와 질투가 난무하고, 건설적인 비평보다는 오히려 파괴적인 비난이 인터넷을 뒤덮고 있을까?
그 이유는 거절감으로 인한 분노입니다. 거절감은 소외감과 배반감(배신)을 포함한 감정입니다. 자기표현이 왕성해지는 사회가 될수록 자신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해 소외감을 느끼게 되고 이러한 소외감은 불신과 배신감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의 이익은 나의 불이익으로 받아들여지는 극단적이고도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이 싹트게 됩니다. 분노와 혈기는 이러한 rejection(거절감)에 대한 반등성향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조승희 사건도 이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분노의 치유"입니다. 마음을 다스리고 우리의 마음의 정원에서 자라고 있는 "분노"라는 잡초를 제거해야 합니다. 국민의 총체적인 분노는 국가의 총체적인 위기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까칠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불특정 다수에 대한 분노입니다. 이러한 분노는 우리에게 이해보다는 오해를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용서보다는 비난과 복수를 선택하게 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도대체 무엇에 분노하고 있는가에 대한 원인을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를 조그만 일에도 참지 못하고 반발하게 하고, 내 일도 아닌 남의(?) 일에 대해 내 일처럼 화를 내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발견해야 합니다. 까칠하게 자기 자신을 마구 표현하는 것이 개성이 아니고, 절제된 나의 표현이 참된 개성이고 아름다운 자아의 표현이라는 사실을 다시 진리로 회복해야 합니다.
이제는 익숙한 감정에 자기 자신을 맡겨버리지 말고 성숙한 감정의 표현으로 성장하는 길을 가야 할 때입니다. 내 안의 분노는 없는가? 왜 나는 분노하는가?
며칠 전 한국에서 프로 축구 2군 경기에 출전했던 안정환 선수에게 지나치다 못해 모욕적인 발언까지 거침없이 표현하는 관중을 향해 안 정환선수가 개인적인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관중석으로 올라가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곧바로 안 선수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제지당해 다행히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충돌은 없었지만 안 선수는 바로 심판에 의해 퇴장 당하고 말았고 경기는 지지부진한 채 매듭을 짓고 말았습니다.
그 사건 자체가 너무나도 치졸하고 일방적인 인신공격으로 말미암은 것이어서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입니다. 인터넷에 소개된 동영상을 통해 본 몇몇 관중의 안정환 선수에 대한 야유는 그 도를 지나쳐서 선수를 격려하는 것은 고사하고 아예 분노를 자극해서 선수로 하여금 도저히 경기를 진행할 수 없을 정도의 발언이었습니다.
물론 프로선수가 그러한 관중의 발언을 무시하고 경기에 전념하였더라면 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발언 가운데는 안정환 선수가 한참 전성기 때의 행동을 비열하게 묘사하고, 그가 받는 급료나 보상금까지도 운운하면서 모욕감을 주는 발언이었기에 그 도가 지나쳤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학력위조 사건으로 언론과 국민들의 집중 화살을 맞았던 신정아씨에 얽힌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의 모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그녀의 심경토로는 뉘우치는 것보다는 분노에 가까운 발언을 하였던 것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5만 번도 더 뚜껑이 열려 억울해 못 죽겠다"는 그녀의 직접적인 표현은 이러한 "까칠한 마음"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공인의 입장을 취하지 않게 하고 오히려 "억울해서 죽을 수 없다"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하게
했을까?
그뿐이 아닙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23명의 선교단이 탈레반에 의해 납치되었다 2명은 순교하고 21명이 마침내 귀환한 사태에서도 똑같이 "까칠한" 상황이 발생하였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소위 "안티 기독교인"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의 지독한 비난의 화살은 그 화살을 직접 받는 교계의 관계자로 하여금 당황하게 만들고 이러한 사람들의 표현에 대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때로 격한 마음에 분노와 반발의 반응을 보이게끔 하고 있습니다.
왜 이러한 인신공격성의 발언들이 요즘 우리 한국에서 발발하고 있을까?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왜 이렇게 비난의 화살을 무차별할 정도로 퍼붓는 세태가 되고 말았을까? 왜 시기와 질투가 난무하고, 건설적인 비평보다는 오히려 파괴적인 비난이 인터넷을 뒤덮고 있을까?
그 이유는 거절감으로 인한 분노입니다. 거절감은 소외감과 배반감(배신)을 포함한 감정입니다. 자기표현이 왕성해지는 사회가 될수록 자신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해 소외감을 느끼게 되고 이러한 소외감은 불신과 배신감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의 이익은 나의 불이익으로 받아들여지는 극단적이고도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이 싹트게 됩니다. 분노와 혈기는 이러한 rejection(거절감)에 대한 반등성향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조승희 사건도 이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분노의 치유"입니다. 마음을 다스리고 우리의 마음의 정원에서 자라고 있는 "분노"라는 잡초를 제거해야 합니다. 국민의 총체적인 분노는 국가의 총체적인 위기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까칠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불특정 다수에 대한 분노입니다. 이러한 분노는 우리에게 이해보다는 오해를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용서보다는 비난과 복수를 선택하게 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도대체 무엇에 분노하고 있는가에 대한 원인을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를 조그만 일에도 참지 못하고 반발하게 하고, 내 일도 아닌 남의(?) 일에 대해 내 일처럼 화를 내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발견해야 합니다. 까칠하게 자기 자신을 마구 표현하는 것이 개성이 아니고, 절제된 나의 표현이 참된 개성이고 아름다운 자아의 표현이라는 사실을 다시 진리로 회복해야 합니다.
이제는 익숙한 감정에 자기 자신을 맡겨버리지 말고 성숙한 감정의 표현으로 성장하는 길을 가야 할 때입니다. 내 안의 분노는 없는가? 왜 나는 분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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