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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사마리아 이해

기독일보 la@christianitydaily.com

입력 Dec 01, 2017 06:18 PM P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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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

 

 

<사마리아의 그리심산>

신약성경에서 많이 언급되는 지역 이름 중에 사마리아는 예수님의 행적과 비유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 좋은 이웃에 대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그런가하면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기피하는 사마리아지방의 수가성에 들어가시어 그곳의 한 여인을 만나신 사건으로 인해 '수가성 여인'이라는 단어를 많은 곳에서 사용하는 것을 봅니다. 뿐만 아니라 열명의 문둥병자를 예수님이 고쳐주셨으나 한 명의 문둥병자가 찾아와 감사인사를 하였다는 기록에서 그 한 사람이 바로 사마리아인이라고 성경은 언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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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는 B.C. 876 년 분열왕국시대에 오므리(Omri) 왕에 의해 세워진 북 이스라엘의 수도였으며, 사마리아란 이름은 사마리아의 산 주인이었던 세멜에게서 기인한 것입니다. 오므리왕의 아들 아합왕은 두로의 공주 이세벨과 결혼하면서 사마리아를 베니게(페니키아)의 큰 영향을 받은 도시로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사마리아 왕궁의 화려함은 예언자 아모스와 호세아를 통해 남아있습니다. '겨울궁' '여름궁' 상아궁' 그리고 '큰 궁'등의 표현은 바로 그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그 아합왕 시대에 유명한 엘리야선지자의 우상숭배자들과의 대결의 현장인 갈멜산이 그 사마리아지역에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앗수르제국(앗시리아)이 북 이스라엘왕국을 치고 그 수도인 사마리아에 군대를 주둔 시켰으며, 바사제국(페르시아)이 그곳을 지배하였을 때에는 그 지역의 수도로 삼았습니다.

B.C. 108년에 유대의 일시적인 독립왕조였던 하스모니안 왕조의 요한 힐카누스는 이 성을 재건하였으며, B.C. 30년에 헤롯 대왕은 옥타비아누스 황제를 위해 이 도시를 수축하여 그에게 헌정하면서 도시의 이름을 세바스티아(Sebaste Augustus 의 헬라 이름)라 불렀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곳의 이름은 세바스티입니다. 현재도 그리심산에 살고 있는 인구 400명 정도의 사마리아인 들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종족입니다.

한때 강력한 힘을 지녔던 사마리아인 들은 2,500년간 순수한 혈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같은 핏줄이던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이 서로 분리된 것은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되고 북부 이스라엘왕국이 우상숭배를 하다가 앗수르에게 망하면서부터입니다. 남 유대왕국의 사람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이후부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같은 동족으로 인정하지 않게 되었으며, 유대지방에서 북부의 갈릴지방을 갈 때에는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멀리 요단강으로 돌아서 다녔습니다.

그것은 사마리아 주민들이 정복자인 앗시리아인들과 혈통적으로 혼합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자신들을 멸시하는 유대인들과 분리하여 그리심산에 별도의 성전을 짓고,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방해하기도 하였습니다. 현재의 사마리아인들은 그들의 옛 율법에 따라 예배하며 제사장이 통치하고 있습니다.

모세 5경만을 믿는 그들은 양피지에 적힌 모세 5경의 고사본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는데, 사마리아인 들은 이것이 손으로 기록한 것 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3,600년 전에 모세의 형 아론에 의해 기록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매년 양을 잡아 그들의 성스러운 산인 그리심 산 위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지금도 유월절 제사는 정확히 구약 그대로 한다고 합니다.

사마리아(SAMARIA)

이스라엘 분열왕국 북쪽 수도였던 사마리아는 세겜으로 북 서쪽으로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놓여 있다. 현재 이름은 헤롯이 이 곳에 새로운 도시를 증축 건설하고 그 이름을 아우구스토스의 헬라어 이름인 로 명명하는데 여기에서 유래하여 Sebastia라고 부른다.

구약 성경시대에 이 곳은 아합의 아버지인 오므리가 세멜에게서 이 지역을 사서 수도로 세우는데 이 산의 주인의 이름인 세멜로부터 사마리아라는 이름이 나온다(왕상 16:24). 사마리아성은 해발 고도 430미터 지점에 위치한다. 그리고 사마리아는 로마시대까지 성의 규모 가 오늘날의 모습으로 확장되게 된다. 이 곳은 지정학적으로(세겜에서 북쪽으로 가는 길목에 있 는 요충지) 경제적인 면에서 풍요한 농경지를 가지고 있어서 수도로 선택되었다

 

사마리아 지도, 사마리아 지역(수가성, 벧엘, PLO의 본부가 있다.

이스라엘 시대(철기시대):

1. 성체의 첫 번째(내부) 벽, 2. 후기의 벽(포대), 3. 성체를 둘러쌓았던 "하층부 벽", 4. 오므리와 아합의 궁전, 5. 상아 궁전, 6. 도기파편이 발견된 집, 7. 성체로 가는 문이 위치해 있는 자리

헬라(헬레니즘) 시대:

8. 원형 탑, 로마 시대: 9. 성벽, 10. 원형 탑을 가진 문, 11. 기둥들이 가로(街路)에 늘어선 길, 12. 아우구스도의 신전, 13. 코레-페르세포네의 신전, 14. 경기장, 15. 극장, 16. 집회장소( , 서쪽 편에 공회당이 있는 공공 광장) 기독교 시대: 17. 비잔틴 시대의 교회, 18. 십자군 시대의 교회(현재 모슬렘 사원)

사마리아는 오므리 시대에 두로와 친근하려는 그의 정책에 걸맞는 장소였다. 왜냐하면 사마리아는 세 겜이나 디르사보다는 두로와 더욱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도시의 이름에 대해 서는 왜 오므리가 이 곳을 산 후에 그의 이름을 따지 않고 원 주인의 이름인 세멜을 그대로 유지 했을까에 대해서 학자들은 이스라엘의 상속 법이 땅을 팔았어도 유업으로 물려받은 땅은 원 주인 의 이름으로 계속 유지되는 관례에 따른 것으로 본다. 오므리의 아들인 아합은 두로의 왕 엣 바 알의 딸인 이세벨과 결혼해서 이 곳을 바알 신앙의 중심지로 만들어 예언자 엘리야의 분노를 산다.

이 지역은 므낫세 지파에 속한 땅이었고 드보의 주장에 의하면 오므리는 원래의 수도 디르사에 서 주민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켜 도시를 건설했다는 것이다. 디르사(엘 파리)의 발굴 결과 동시대 인 주전 9세기에 디르사에 주민이 급격히 줄어든 증거를 예로 든다. 아무튼 오므리가 동쪽인 디 르사에서 서쪽인 사마리아로 수도를 옮긴 다른 이유는 요르단 강 건너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침 입을 막기 위해서 했다는 주장도 있다. 세겜에서 동북쪽 방향인 와디 밧단을 지나 디르사로 가면 아브라함과 야곱이 지나갔던 길들을 만나게 되고 세겜에서 서쪽을 사마리아 방향 쪽으로 가면 요 셉이 형들을 만나기 위해 세겜을 거쳐 도단으로 갔던 길을 만나게 되고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 성에 가셨을 때 지나가셨던 길과 나사렛으로부터 예루살렘을 오고 가실 때 지나셨던 길을 접 하게 된다.

예수님 당시에는 사마리 아는 헤롯왕에 의해 아름다운 도시로 건설되어 거룩의 이름을 가진 황제의 도시 세바스티야로 불리우고 있었다. 그러나 구약 전통에 의하면 거룩은 하나님께만 해당되어 사용되는 언어였으며 구약에서 황제 숭배는 다니엘의 경우만 보더라도 철저히 배격된다.

아합은 이 곳에 상아궁을 짓고 바알 신앙을 위한 사당을 지어 이스라엘을 멸망으로 치닫게 만 든다(왕상 16:30-33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 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숭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사당속에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으니 저는 그 전의 모든 이스라엘 왕보다 심 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었더라").

 

사마리아에 있는 제단

사마리아는 외국의 침입에 종종 봉쇄되는 수모를 맛보며 결국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아합 왕 때는 아람 왕 벤하닷에 의해 봉쇄되나 하나님의 사람의 도움에 의하여 위기를 모면하게 되나 아합은 유다왕 여호사밧과 함께 사마리아 성 성문 앞 광장에 앉았을 때에 하늘의 신비한 환 상을 본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요르단 강 건너 길르앗 라못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왕상 22). 왕하 6장 이하에서는 아람군대에 의해 사마리아 성이 포위되어 성안에 먹을 것이 없이 아들 을 삶아 먹을 때에 4명의 문둥병자를 통해 기적적으로 성이 구원 받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 리고 아람의 군대 장관 예후가 이 사마리아 성에서 아합의 아들 70명을 성의 지도자들을 통하여 죽게 한다(왕하 10).

주전 734-732년 베가 왕 때에 앗수르 왕 티글랏 빌레셋 3세의 침공으로 사마리아 주민들의 유 배가 시작되고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아 7년부터 9년까지 앗수르의 왕 살만에셀에게 성을 포 위당하다가 그의 갑작스런 죽음후 그의 아들 사곤 2세에 의해 완전히 함락당하고 역사 속에서 사 라지고 만다(주전 722). B.C.년 무렵에 이스라엘의 여섯 번째 왕, 오므리에 의해서 건설되었다(왕상 16:24).

사마리아는 대략 430 미터 높이의 산언덕에 위치하고 있는데, 예루살렘에서부터 북쪽으로 68km, 지중해 로부터는 40km정도 떨어져 있다. 이 언덕은 남북을 연결하는 주요 도로가 지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동서를 연결하는 길목을 관할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마리아는 산 언덕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방어가 용이한 장점을 갖고 있다. 도시의 취약점 은 가장 가까운 샘물이 일 마일 이상 떨어져 있는 것인데, 이러한 취약점은 물탱크들을 만들어서 보완할 수 있 다. 사마리아는 아람왕 벤하닷의 공격을 극복할 수 있었지만(왕하 6:24-25), 결국에는 앗시리아에 의해서 722/1B.C. 년에 정복되었다.

앗시리아 제국은 사마리아를 정복하고 난 다음에 그 곳 주민 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그리고 그 도시는 "바벨론, 구다, 아와, 하맛, 스발와임"에서 옮겨온 새로운 주민들에 의해서 정착되어졌다(왕하 17:24-25). 이러한 사람들에 의해서 이방 종교 관습들이 이스 라엘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만들었다. 이러한 사람들과 혼합된 결혼관계에 의해서 형성되어 진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요 4:1-10).

사마리아에 대한 고고학 발굴 결과, 고고학자들은 수차례에 이르는 이스라엘 시대의 주거층을 확인하였다. 처음 두 번째 까지의 지층, 즉 오므리와 아합 시대에는 페니키아 사람들의 건축술이 반영된 주의깊은 건축술이 반영되어 있다. 이 시대에는 도시의 최대 규모가 아마도 20에이커 정 도 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6내지 8미터 두께의 성벽성벽이 함께 만들어진 성벽으로 건축되었다. 높은 봉우리의 서쪽 가장자리 부 분에 2층 짜리 왕궁이 건설되었었고, 그 주변의 광장에서 5*9 미터 크기의 못이 발견되었는데, 아 마도 이 못이 아합이 아람 사람과의 전쟁에서 죽어서 그 병거를 씻었던 못(왕상 22:38)이었을 가 능성이 아주 높은 못으로 생각되고 있다.

왕궁은 '상아궁'(왕상 22:39, 암 3:15)이었던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못 근처에 있던 한 창고를 발굴하면서 약 500여개의 상아로 만든 장식품들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장식품들은 가구나 벽면을 장식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던 것들로 보여진다.

세 번째 지층의 경우는 예후 시대(841-813 B.C.)의 것으로써, 새로운 건물들의 추가와 재건되어 진 흔적들을 발견하였으며, 네 번째부터 여섯 번째 까지의 지층은 여로보암 II세 시대 이후의 건 물들로써 앗시리아에 의해서 멸망하기 이전까지의 건물들인데 많은 재건과 보수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건물들 중에 한 곳에서 102개의 오스트라카들이 발견되었다. 이것들 가운데 63개가 레이즈너에 의해서 판독되었으며(1-63), 나머지는 카우프만의 박사논문에 판독되어있다(64-102). 이러한 오스트라카들은 어떤 지역으로부터 사마리아로 보내어진 물품들의 목록과 그것을 보낸 사람들과 받은 사람의 이름과 연도가 적혀있다.

헬라시대의 건축물의 일부가 폐허 형태로 남아있으며, 원형으로 생긴 망대들은 헬라 시대의 대 표적 건축술들을 반영해주고 있다.로마시대의 건축물은 서쪽 문에서 들어오면서 남아있는 돌기둥들이 나란히 늘어서있는 거리에 서 확인해 볼 수 있으며, 수로 시설, 스타디움, 그리고 극장 건물들은 로마시대의 것들이 남아있 는 유적들이다. 세바스티예라는 작은 아랍 마을이 고대 사마리아 도시 지역에 오늘날 남아있는데, 세바스티예 는 세바스테라는 그레코로마식 이름의 변형이다. 이스라엘의 사마리아가 멸망되고 난 이후에도 앗시리아, 바빌론, 페르시야, 헬라, 로마 시대에 이르도록 계속적으로 사람들이 살아왔었고, 헤롯 대왕이 통치하던 때(37 B.C-4 B.C.)에 사마리아 지역을 재건하고 도시 이름을 로마 황제를 위하 여 세바스테라고 개명하였다. 세바스테는 아우구스투스의 헬라식 명칭이다. 바로 이 시대의 도시 가 사도행전에 언급되어 있는(행 8:5) 사마리아임이 분명하다.

[출처:http://blog.daum.net/dfgi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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