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렬 교수(미드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 신약학)
이장렬 교수(미드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 신약학)

목회자와 선교사를 양성해내는 신학교에서 사역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복음”을 더 온전하게, 동시에 더 쉽고 명확하게 제시하고 가르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아울러 복음의 깊이와 넓이를 가장 압축적으로, 선명하게 잘 보여주는 성경 본문이 어느 구절일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런 가운데 누가복음 19:1-10을 묵상하였고 이 구절이 가진 깊이와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되었다. 물론 전에도 “삭개오"라는 인물을 소개하는 이 구절을 많이 읽었다. 이제 11살이 된 아들보다 더 어린 시절부터 세리장 삭개오 이야기를 귀가 닳도록 들었다. 그는 “키가 작은 삭개오,” “세리장 삭개오,” “뽕나무에 오른 삭개오” 등의 제목으로 어린이 설교에 자주 등장하는 인기 스타였다. 그렇기에 그에 대해선 제법 잘 안다고 지난 수십 년간 자부했었다. 하지만 한 절 한 절, 천천히 곱씹으며 읽어 내려간 삭개오 이야기는 내게 너무나 신선했다.

누가복음 19장의 삭개오 이야기는 은혜로 가득 차 있다. 브래넌 매닝의 회고록 제목처럼 “모든 것이 은혜다”라는 사실을 시인하게끔 만든다. 삭개오는 죄인과 세리의 친구로 알려진 예수님의 얼굴을 꼭 한 번 보고 싶었다. 하지만 수많은 군중 그리고 자신의 작은 키 때문에 여의치 않았다. 아마 그가 그간 이웃에게 한 짓 때문에 군중들을 헤치고 나아갈 용기조차도 없지 않았을까? 적어도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그럴 용기가 있었다. 하지만 삭개오는 이미 알려진 얼굴, 그리고 지탄받는 악행으로 그런 용기조차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삭개오의 부(wealth)는 이웃의 궁핍과 굶어 죽음을 상징한다. 삭개오가 살고 있었던 마을, 이 세리가 사는 것 같지 않게 살고 있던 그 마을을 예수님이 지나가실 시간이 다가온다. 이제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 그래서 세리장은 마침내 뽕나무에 오른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시는 이 장엄하고 심각한 여정 중에도, 유대인지만 전혀 유대인 취급을 전혀 받지 못 하는 한 안타까운 영혼, 자신과 가족만 잘 된다면 이웃이 몰락하고 굶어 죽어도 개의치 않는 자, 세리 삭개오를 찾아 오신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삭개오”는 “정결하다” 또는 “무죄하다”는 뜻이다. 눈꼽만큼도 ‘정결’하지 않은 자, 이웃들이 이름대신 “죄인”으로 명명하는 삭개오(7절)를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 오신 것이다. 그리고는 “정결한 자,” “무죄한 자”라는 그의 이름을 직접 불러주신다. 잠시 삼천포 행 열차를 탄 것일까? 예수님이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시는 장면은 김춘수 시인의 <꽃>을 떠오르게 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누가복음 본문으로 돌아온다. 예수님께서는 한 발 더 나아가 삭개오의 집에 머물겠다고 선언하신다. 삭개오와 친구가 되어주시겠다는 뜻이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세리들과 일체 상종하지 않았다. 세리들과 상종한다는 것은 그들의 악행을 인정하고 그들과 같은 부류의 죄인이 되어버린다는 중대한 종교-사회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렇기에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교제하는 것에 대해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우리에게도 “유유상종”이란 말이 있지 않던가? 바리새인들에게 사람 취급을 못 받던, 이웃들에게 유대인 취급 못 받던 삭개오를 친구 삼아 주시는 예수님으로 인해 삭개오에게는 기쁨이 넘친다. 그때나 오늘이나 주님의 은혜는 기쁨을 가져다 준다.

삭개오를 찾아가셨던 은혜의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를 찾아오신다. 예수님이 고치지 못 할 인생은 없다. 그리스도께서 재활 복구시키지 못 할 만큼 심하게 망가진 인생이나 사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간 어떤 일을 겪었든, 지금 어떤 상황 가운데 놓여 있든, 미래를 생각할 때 어떤 낙담과 좌절 가운데 휩싸여 있든 예수님의 현존은 우리를 일으키시고도 남을 능력이 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를 찾아오신다. 은혜로 찾아오신다. “모든 것이 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