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사람은 늘 세 가지 고민을 하며 살아간다고 합니다. 물질, 사람, 자신입니다. 물질을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모으기 위해 고민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가 충족되면 사람에 대한 욕심이 생겨서 그 물질이나 힘으로 사람을 사고, 지배하려고 한답니다. 이 단계가 넘으면 이제 자신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일리 있는 주장이란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결국 끊임없이 ‘채우려는 인간의 욕망’에서 오는 문제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한편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와 사람을 발전적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도를 넘는 경우 오히려 자신뿐 아니라 주변이 파멸될 수 있음을 망각하게 하기도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성자가 길을 가다가 두 사람과 동행을 하게 됩니다. 아주 사이 좋게 덕담을 나누며 여행을 하였고, 헤어질 무렵에 성자는 먼 길을 지치지 않게 오게 되어 감사하다는 의미로 소원을 들어주기로 합니다. 조건은 먼저 말한 사람의 두 배를 다음 사람이 받기로 하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좋아한 두 사람은 서로 눈치만 보고 소원을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말하면 저 사람이 나의 두 배를 받겠지?’ 하는 생각에 눈치만 보는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흘러 기다릴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자 다툼이 났습니다. 서로 먼저 말하라 다투다가 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에게 얻어맞게 됩니다. 맞아서 화가 난 사람은 소원을 말하길 “내 눈 하나를 뽑아주세요.”라고 말하고 맙니다. 결국, 다른 사람은 두 눈을 뽑히고 말았습니다.
욕심은 자신을 이롭게 할 수 없는 것뿐 아니라 서로 건강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예수님은 아무것도 세상 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부자 관원’을 향하여 “너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 말씀하시며 “너의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부자 관원은 이런 이야기를 듣기 위해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닐지 모릅니다. 자신이 남부끄럽지 않게 가진 재물이나 사회적 지위, 남들이 말하는 구원의 조건이 될 만한 모든 율법을 지켰기에 요즘 대세라 불리는 선생님에게 확인 한 번 더 받으므로 자신의 입장과 위치를 더욱 공고히 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찾은 건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과는 ‘근심하며 떠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부자 청년은 자신을 지금까지 지탱하게 했던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영혼의 필요를 보지 못하고 따르지 못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와 비슷하지만 비견되는 내용이 다음에 나옵니다. 부자요 관리였던 ‘삭개오’라는 사람은 자신의 재산을 스스로 내려놓고, 포기함으로 자신뿐 아니라 그 가족이 주님을 만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복을 누리게 되는 모습입니다.
지금 당신에겐 어떤 고민이 있습니까? 물질에 대한 고민입니까? 사람에 대한 고민입니까? 자신에 대한 고민입니까? 그 내용을 무엇으로 채우길 원하십니까? 과거의 성공, 재산? 학벌이나 집안입니까? 지식입니까? 아니면 가난이나 실패? 바라기는 이런 과도한 욕심들로 여러분을 만들어 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인생의 고민은 주님만 바라보고, 그를 만날 때 해결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이 가진 것들을 놓고 비교해 보시길 바랍니다.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지, 그 마지막까지 남은 것이 바로 예수님이 아니라면 당신은 그것을 ‘포기하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Kisung
Feb 2, 2013
이것은 결국 끊임없이 ‘채우려는 인간의 욕망’에서 오는 문제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한편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와 사람을 발전적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도를 넘는 경우 오히려 자신뿐 아니라 주변이 파멸될 수 있음을 망각하게 하기도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성자가 길을 가다가 두 사람과 동행을 하게 됩니다. 아주 사이 좋게 덕담을 나누며 여행을 하였고, 헤어질 무렵에 성자는 먼 길을 지치지 않게 오게 되어 감사하다는 의미로 소원을 들어주기로 합니다. 조건은 먼저 말한 사람의 두 배를 다음 사람이 받기로 하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좋아한 두 사람은 서로 눈치만 보고 소원을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말하면 저 사람이 나의 두 배를 받겠지?’ 하는 생각에 눈치만 보는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흘러 기다릴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자 다툼이 났습니다. 서로 먼저 말하라 다투다가 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에게 얻어맞게 됩니다. 맞아서 화가 난 사람은 소원을 말하길 “내 눈 하나를 뽑아주세요.”라고 말하고 맙니다. 결국, 다른 사람은 두 눈을 뽑히고 말았습니다.
욕심은 자신을 이롭게 할 수 없는 것뿐 아니라 서로 건강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예수님은 아무것도 세상 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부자 관원’을 향하여 “너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 말씀하시며 “너의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부자 관원은 이런 이야기를 듣기 위해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닐지 모릅니다. 자신이 남부끄럽지 않게 가진 재물이나 사회적 지위, 남들이 말하는 구원의 조건이 될 만한 모든 율법을 지켰기에 요즘 대세라 불리는 선생님에게 확인 한 번 더 받으므로 자신의 입장과 위치를 더욱 공고히 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찾은 건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과는 ‘근심하며 떠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부자 청년은 자신을 지금까지 지탱하게 했던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영혼의 필요를 보지 못하고 따르지 못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와 비슷하지만 비견되는 내용이 다음에 나옵니다. 부자요 관리였던 ‘삭개오’라는 사람은 자신의 재산을 스스로 내려놓고, 포기함으로 자신뿐 아니라 그 가족이 주님을 만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복을 누리게 되는 모습입니다.
지금 당신에겐 어떤 고민이 있습니까? 물질에 대한 고민입니까? 사람에 대한 고민입니까? 자신에 대한 고민입니까? 그 내용을 무엇으로 채우길 원하십니까? 과거의 성공, 재산? 학벌이나 집안입니까? 지식입니까? 아니면 가난이나 실패? 바라기는 이런 과도한 욕심들로 여러분을 만들어 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인생의 고민은 주님만 바라보고, 그를 만날 때 해결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이 가진 것들을 놓고 비교해 보시길 바랍니다.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지, 그 마지막까지 남은 것이 바로 예수님이 아니라면 당신은 그것을 ‘포기하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Kisung
Feb 2,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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