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집사님 한 분이 목사님를 찾아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목사님은 떡고물만 주시지 않고 알맹이를 주셨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이유를 가만히 들어보니 요즘 목사님들의 설교가 ‘천편일률’적으로 은혜와 사랑만 강조하고 ‘모두 괜찮다, 잘 될 것이다’란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성경이 말씀하는 오실 메시아와 종말 심판에 대하여 전하기를 포기한듯하다는 것입니다. 오실 메시아를 전하려면 종말과 재림에 대하여 전해야 하는데 당최 종말에 관한 이야기는 교회에서 들을 수 없고 오히려 세상에서 더 많은 관심을 두고 떠들어 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차에 종말과 재림에 대한 설교를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의미였습니다.

목사님들이 종말과 재림에 대한 설교를 꺼리는 것은 아닙니다. 자칫 성도들의 삶이 너무 극단적인 모습을 가질지도 모르기에 조심하는 것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또 하나는 뭐 예수님이 오신다고는 했지만 분명하게 언제 오신다는 말도 없고, 벌써 2000년 전부터 오신다 했는데 아직 안 오신 거 보면 그거 말했다가 잘해야 본전도 못 찾는다는 심리가 내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여기에 성도들의 삶의 자세도 한몫합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함흥차사’로 비유합니다. 대단한 오해입니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안 오시는 것도 아니고, 그때를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성경에 초림에 대한 구약 예언이 456회가 언급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시겠다는 재림에 대한 예언은 무려 1,518회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약속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럼 456회의 약속이 이루어졌다면 그 보다 세배 이상이나 하신 약속을 지키지 않으실 리가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때에 대한 성취입니다.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마 24:30)을 우리는 너무 의미 없이 받아 드립니다. 그러기에 아무도 모르니 그냥 덮어놓고 살라는 말씀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닙니다. 성경의 많은 곳에 종말에 대한 경고와 예언들,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들로 ‘노아의 때’와 ‘롯의 때’ 등 말세에 나타날 징조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그때의 특징들을 살펴보면 현대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그런 소리는 들어왔다고 치부해 버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항상 들어왔던 이야기가 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이 다시 오시는 때가 ‘노아의 때’처럼 먹고 마시는 ‘부지불식’ 간에 오신다 하신 것입니다.

이제 언제 오시느냐? 라는 질문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를 잊지 말고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너무 많은 말세 징조 중 하나가 복음의 바른 교훈들을 버리고 세상의 잘 못된 교훈들을 따르고, 배교하고, 자긍하고, 그저 주님의 오실 것을 망각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주변에 일어나는 자연적 ‘천재지변’의 변화는 차지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인 당신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잃고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종말의 때’를 가리키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폴란드의 유명한 철학자인 ‘레젝콜라콥스키’는 “이 세상을 타락시킨 원흉이 기독교인이다. 이 세상이 심판받아 마땅한 곳으로 변한 원인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당신의 신앙을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곁에 있는 신앙의 동지를 보시길 바랍니다. 세상과 다를 바가 없다면 주님 오실 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때를 재촉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가 마지막 때인가? 주님은 언제 오시는가? 의 물음보다 더 중요한 것을 기억하며 삽시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엡 6:10)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에 동화되어 살지 말고, 세상을 이기며, 성도로서의 마땅한 삶을 살아가는 그것이 주님을 기다리는 바른 삶인 것을 말입니다. @Kisung
Jun 12,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