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최고 테너로 추앙받는 엔리코 카루소(Enrico Caruso)는 나폴리의 가난한 기계기사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는 화려한 목소리로 그의 가창법은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비교적 뒤 늦게 성악계에 입문하였는데 변성기가 일찍 찾아와 어려서 품어온 성악가가 되겠다는 희망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가 군대 입대하였을때 뜻밖의 행운이 찾아 왔는데 부대장이 그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감탄해 몇 개월 동안 특별 휴가를 주어서 성악공부를 시킨 것이다. 이를 계기로 전문성악가에게 사사하면서 성악공부에 매진을 하여 1894년에 첫 오페라 무대에 서게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의 목소리는 성량이 풍부하지 못해서 테노리노(작은 소리의 테너)라고 야유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피 눈물 나는 노력을 통해 그의 전성기때는 그의 목소리가 스칼라좌의 천장에 있는 샹들리에를 공명을 해서 울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결혼생활은 순탄치않아 그의 아내 소프라노 자케테는 두 아이를 두고 카루소가 남미 연주여행을 떠난 사이 다른 남자와 가출을 하여 파경을 맞는다. 그는 재미있게도 노래만큼 그림그리는 솜씨가 출중하여 미국의 이태리 교민신문에 오랫동안 만화를 연재하기도 했다. 이 위대한 이탈리아인 테너 카루소의 출연은 이후 그 후예들이 줄줄이 탄생하게 될 전조였던 것이다. 카루소는 1921년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해에 마리오 란자(Mario Lanza), 주세페 디 스테파노, 그리고 프랑코 코렐리가 태어났던 것이다. 오늘날 세계 3대 테너로 각광을 받는 루치아노 파파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처럼 그들은 전시대의 3대 테너로 명성을 날렸던 것이다.

그들 중 마리오 란자는 미국 Philadelphia에서 출생 어린 시절부터 카루소를 우상으로 삼았고 후일 오페라 무대에서 카루소와 같은 훌륭한 성악가가 되기를 바랬다. 카루소가 성악가로 데뷔한것이 드라마틱했던 것처럼 마리오 란자도 비슷하였다. 그는 트럭 운전사로 일하면서 성악 교사의 지도를 받고 지내던 중, 20세가 되던 어느날 커티스 음악원 강당에 피아노를 배달하러 가서 평소처럼 오페라 아리아를 흥얼거리며 일을 하고 있었다. 때마침 이곳을 지나던 당시 보스톤 심포니의 지휘자 쿠세비츠키는 그의 예사롭지 않은 재능에 놀라 그를 픽업했던 것이다. 그는 파파로티처럼 무슨 특별한 음악공부를 하지않은 요즘 말로하면 예능 뮤지션이었던 것이다. 2차 대전 후인 1945년 최대의 레코드사였던 RCA사와 전속 레코딩 계약을 체결, 히트메이커로서 오페라 극장과 음반계를 섭렵했다. 미남이었던 그는 할리우드 배우로서 영화까지 진출했다. 영화 '위대한 카루소'에 카루소역을 담당한 마리오 란자는 어렸적 그의 꿈을 이루었던 것이며, 그가 부른 황태자의 첫사랑중 축배의 노래는 만 연인들의 축송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959년 8월 7일 로마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카루소의 계승자로 불리던 마리오 란자는 38세의 나이로 아깝게 요절하였던 것이다.

그가 카루소애 빠졌던 것처럼 스페인의 호세 카레라스는 7세 때 그의 고향 바르셀로나에서 상연 중이던 영화를 보고는 란자의 노래에 넋이 빠져 자신도 크면 반드시 란자와 같은 그리고 카루소와 같은 성악가가 되리라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같은 결심은 카레라스의 천재성과 결부되어 그 역시 세계 최정상의 테너가 되었고, 1993년에는 그에게 성악도의 꿈을 심어 주었던 란자를 기리며 'With a song in my heart'라는 타이틀로 추모앨범을 냈다. 이렇게보면 카루소는 마리오 란자를 마리오 란자는 호세 카레라스를 낳았던 것이다. 현대에도 이와같은 바위소년들이 부지기수로 나타나 문화를 풍요롭게 하고 있다. 이같이 한국의 교계에도 주기철이나 손양원을 해바라기하는 영적 후계자들이 많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