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는 동물의 왕이다. 물론 호랑이가 들으면 섭섭할 것이다. 그러나 호랑이가 맹수이지만 왕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사자와 호랑이가 일대일로 싸우면 아마도 호랑이가 이길 수 있는 확률이 많을 것이다. 호랑이는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한다. 그 용맹과 민첩함과 기술은 사자보다 뛰어날 것이다. 더군다나 험한 산악에서 지내니 체력도 대단할 것이다.
그러나 사자는 혼자 지내지 않는다. 물론 사자가 혼자일 때도 있다. 그러나 사자가 먹이를 사냥할 때면 늘 옆에 사자들이 따라 다닌다.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를 정도로 사자의 포효소리, 그리고 짐승의 울음소리를 듣고 어슬렁어슬렁 큰 입을 다시며 사냥감 곁으로 다가온다. 사자는 무리들과 사는 가족중심적인 동물이다. 그래서 사자(獅子)는 사자(四者)이다. 사자가 왕이라 할지라도 그 왕은 혼자서 누리는 왕이 아니라 함께 누리는 사자(四者)들의 사자이다.
사자가 들소를 잡거나 아니면 코끼리나 하마를 잡는 것을 보면 놀랍기 그지없다. 한두 마리의 사자가 뒤를 공격해서 힘이 빠질 때 재빠른 사자가 등위로 올라가 척추를 물어뜯는다. 등뼈를 부러뜨리기도 하지만 등골을 다치게 하므로 운동신경을 마비시킨다. 그때 다른 사자는 날카로운 이빨로 목을 조여 숨통을 끊어뜨린다. 결국 제 아무리 큰 코끼리 같은 동물이라도 도저히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을 만나게 되고, 슬프고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서서히 사자에게 먹이가 되도록 굴복하게 된다. 그렇게 잡은 사냥감은 언제나 함께, 같이, 서로, 모두와 더불어 나누어 먹는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한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도서4:12)
어린 시절 교회 다닐 때 권사님들이 대표기도하실 때 “하나님의 사자(使者)를 붙들어 주옵소서”라는 기도를 들었을 때 고민을 했다. 그 사자(使者)가 어떤 사자인가?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자가 바로 하나님의 종 목사님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한번은 다른 권사님이 사자라는 말을 쓰지 않고“하나님의 종 목사님을 붙들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한 적이 있었다. 기도 후 설교 전에 목사님이 단에서 이렇게 말씀했다. “하나님의 종 종, 하면 마치 목사를 종으로 생각하니 종보다는 하나님의 사자라고 하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라고 하셨다. 사실 사자(使者)의 의미는 사도와 같은 뜻이다. 사도라는 말은 그리이스어로 아포스톨로스(ἀπόστολος)인데 ‘보냄을 받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당시에 종(둘로스- δοῦλος)은 인격이 아니라 물건의 개념이 컸다. 사도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사자요, 종이라고 했다(디도서1:1). 바울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이 쓰실 만큼 쓰시다가 죽여서 버려도 괜찮다는 인식을 한 것이다. 자기는 주인이 죽으라면 죽고, 살려주면 사는 그런 존재라고 생각했다. 예수님도 하나님께서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종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요즈음 교회 안과 밖에서 사자(使者)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 좋다. 하지만 혹자들은 나라님들이 죽어야 백성이 살고, 교회가 죽어야 예수님이 산다고 말들을 한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셨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10:45).
기독교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내가 죽으면 네가 살고, 네가 죽으면 우리가 살고, 우리가 죽으면 교회가 살고, 교회가 죽으면 세상이 사는 것이 기독교이다. 사자(使者)가 사자(死者)가 아니라면 누가 대신 죽겠는가? 아마도 보내신 주인, 곧 하나님이 죽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러나 사자는 혼자 지내지 않는다. 물론 사자가 혼자일 때도 있다. 그러나 사자가 먹이를 사냥할 때면 늘 옆에 사자들이 따라 다닌다.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를 정도로 사자의 포효소리, 그리고 짐승의 울음소리를 듣고 어슬렁어슬렁 큰 입을 다시며 사냥감 곁으로 다가온다. 사자는 무리들과 사는 가족중심적인 동물이다. 그래서 사자(獅子)는 사자(四者)이다. 사자가 왕이라 할지라도 그 왕은 혼자서 누리는 왕이 아니라 함께 누리는 사자(四者)들의 사자이다.
사자가 들소를 잡거나 아니면 코끼리나 하마를 잡는 것을 보면 놀랍기 그지없다. 한두 마리의 사자가 뒤를 공격해서 힘이 빠질 때 재빠른 사자가 등위로 올라가 척추를 물어뜯는다. 등뼈를 부러뜨리기도 하지만 등골을 다치게 하므로 운동신경을 마비시킨다. 그때 다른 사자는 날카로운 이빨로 목을 조여 숨통을 끊어뜨린다. 결국 제 아무리 큰 코끼리 같은 동물이라도 도저히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을 만나게 되고, 슬프고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서서히 사자에게 먹이가 되도록 굴복하게 된다. 그렇게 잡은 사냥감은 언제나 함께, 같이, 서로, 모두와 더불어 나누어 먹는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한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도서4:12)
어린 시절 교회 다닐 때 권사님들이 대표기도하실 때 “하나님의 사자(使者)를 붙들어 주옵소서”라는 기도를 들었을 때 고민을 했다. 그 사자(使者)가 어떤 사자인가?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자가 바로 하나님의 종 목사님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한번은 다른 권사님이 사자라는 말을 쓰지 않고“하나님의 종 목사님을 붙들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한 적이 있었다. 기도 후 설교 전에 목사님이 단에서 이렇게 말씀했다. “하나님의 종 종, 하면 마치 목사를 종으로 생각하니 종보다는 하나님의 사자라고 하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라고 하셨다. 사실 사자(使者)의 의미는 사도와 같은 뜻이다. 사도라는 말은 그리이스어로 아포스톨로스(ἀπόστολος)인데 ‘보냄을 받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당시에 종(둘로스- δοῦλος)은 인격이 아니라 물건의 개념이 컸다. 사도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사자요, 종이라고 했다(디도서1:1). 바울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이 쓰실 만큼 쓰시다가 죽여서 버려도 괜찮다는 인식을 한 것이다. 자기는 주인이 죽으라면 죽고, 살려주면 사는 그런 존재라고 생각했다. 예수님도 하나님께서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종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요즈음 교회 안과 밖에서 사자(使者)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 좋다. 하지만 혹자들은 나라님들이 죽어야 백성이 살고, 교회가 죽어야 예수님이 산다고 말들을 한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셨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10:45).
기독교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내가 죽으면 네가 살고, 네가 죽으면 우리가 살고, 우리가 죽으면 교회가 살고, 교회가 죽으면 세상이 사는 것이 기독교이다. 사자(使者)가 사자(死者)가 아니라면 누가 대신 죽겠는가? 아마도 보내신 주인, 곧 하나님이 죽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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