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전 캘리포니아 남가주에서 우리를 매우 노엽게 만들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어느 유능한 교포 청년이 보험금 사기죄로 걸려든 사건입니다. 변호사, 의사, 자동차 바디샵들과 공모하여 작은 자동차 사고를 큰 사고로 속여서 거액의 보험금을 타내는가 하면, 사고를 조작하기에 이르러 인명피해까지 주더니 결국 자신의 인생을 젊은 나이에 망치게 되었던 일입니다. 돈에 눈이 어두워져 그런 상황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훌륭한 대학 출신으로서 평상시 두뇌가 비상하다는 평을 들었던 청년입니다. '차라리 무지하여 보험관계, 법률관계, 의료관계에 대해서 몰랐었다면 성실히 노동하여 하루 일당을 받아 살며 떳떳이 일생을 보람있게 살아갈 수 있었을텐데...'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 사건은 아울러 그 얼마 전 부유한 동네에서 좋은 고등학교에 다니던 한국 학생들이 교장실에 침투해 자신들의 성적표를 조작하려다가 발각된 수치스러운 사건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너무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지혜가 곧 삶의 수단으로,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무분별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인격의 소중함과 인간의 됨됨이보다는 물질의 많은 소유와 높은 학위, 비싼 자동차와 큰 집등이 한 인생의 성공 여부를 가름하는 기준으로 사용되고 있는 사회풍조가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사회풍조가 교회 내로 침투해오면서 교회 역시 성서적 가치관을 세상과 합리화 시켜나가면서 오히려 세상적인 것이 교회와 신앙생활의 가치기준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양을 강조하는 가운데 질에 대한 관심은 약해지고, 건물과 사업을 강조하는 가운데 한 개인의 신앙인격에 대한 초점이 흐려져 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전에 들었던 다음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매우 추운날 새벽 3시에 한 선교사 지망생이 면접시험을 치르러 선교국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8시가 되어서야 시험관이 도착했고, 그 시험관은 아주 쉬운 문제를 내었습니다. 영어 문제로 “제방업자(Baker)라는 단어를 써보시오.”, 수학 문제로는 “2의 두배는 얼마요?” 그는 초등학생 수준의 문제같은 것을 내어 주는 것이 이해가 안갔지만 Baker라고 쓰고, 또 2의 두배는 4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시험관은“참 잘하셨습니다. 합격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이 시험관은 선교위원회에서 그 선교사 지망생을 극진히 칭찬하면서 그가 선교사의 자격을 너무 잘 갖추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첫째, 극기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추운날 새벽 3시에 오라고 했는데 아무런 불평이 없었습니다. 둘째, 시간을 엄수했습니다. 셋째, 다섯시간을 기다리는 인내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넷째, 어린이 시험문제로 시험을 보는데도 기분 나쁜 표정 한 번 짓지 않고 겸손하게 시험을 치르고 합격했습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선교사로서의 자격요건을 다 갖추었으므로 기꺼이 선교사로 파송할 것을 추천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기뻐 사용하시는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오늘 사회와 교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바보스러워 보일지 몰라도 돌아서서는 모두가 마음속 깊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존경하게 되는 사람이 바로 이런 이타적인 사람, 인내의 사람, 진실된 사람, 겸손한 사람입니다.

요즈음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이 대학으로부터 입학통지서를 받고 있습니다. 기쁨과 실망이 엇갈리는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인생에 무엇이 보다 중요한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라고 권고하시며 이 일에 더욱 힘쓸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베드로후서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