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에 미국에 와서 고향 타령을 한다는 것은 좀 모자라는 사람같다. 그러나 실개천에서 태어난 새끼 연어가 북 태평양에서 크게 자라면 자신이 태어났던 그 곳을 찾아가 산란을 하고 죽는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어찌 인간이 자신의 고향을 잊을 수가 있겠는가! 더욱이 새문화에 적응하는데 힘이 들고 어떤 한계를 느끼며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사는 이민자에게는 어머니 품같은 고향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 부부는 몇 년 만에 그리운 고향을 다녀왔다. 지난 사십 여년 살던 서울에서 옛 친구들과 교우들 그리고 선후배들을 만나면서 몇 주간 지낸 것이 마치 동화에 나오는 용궁에 갔다 온 기분이다. 이번에는 전라도 남쪽 바다를 끼고 해남 주위와 제주도의 아름다운 산천을 둘러보고 강원도 휴전선 주위도 다녀왔다. 때는 마침 산천과 수목들이 형형색색 짙게 물든 가을, 한국 특유의 아름다운 산천에 만취되었다.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산천은 마치 어머니의 포근한 품같은 안위감을 주며 향토감짙은 음식들은 내 마음을 사로잡아 넋을 잃었다. 물론 미국 안에도 수 만년동안 자연이 만들어 놓은 웅장하고 오묘한 자연 경관을 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오고 열린 입이 닫혀 질 줄을 모르지만 한국에서의 느낌은 달랐다. 즉 제 삼자로 자연을 바라보며 감탄사를 연발하는 것과는 달리 그 자연 속에 내가 녹아져서 하나가 되었다. 산을 보면 내가 그 옛날 배낭을 메고 친구들과 같이 올라갔던 그 산 같고 강이나 바다를 만나면 대동강이나 한강에서 수영을 했던 기억이 떠오르며 돌산을 걸으면 어린 시절 도시락을 둘러메고 전교생이 소풍갔던 곳으로 착각을 했다. 뿐만 아니라 전철이나 버스를 타면 모든 분들이 오랜 친지같고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

한국은 생동력이 넘친다. 아침 6시쯤이면 캄캄한 새벽이지만 신문 배달원이 각 아파트 문 안으로 아침신문을 넣어 주기 바쁘고 성경과 찬송가를 낀 신도들이 새벽기도회가 끝나고 집으로 달리고 대중목욕탕으로 가는 어르신네들, 산으로 올라가는 남녀들, 한 쪽의 간이 식당에는 해장국 손님이 꽉 찼다. 날이 조금씩 밝아 오면서 가방을 맨 학생과 샐러리맨 들이 걷기 보다는 뛴다. 버스는 줄줄이 달리고 자가용 차들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낮 시간이 되면 큰 길 좁은 길은 걷는 사람으로 차고 넘치고 큰 백화점에는 발 들여 놓을 수가 없이 많은 숙녀들이 보따리를 들고 나오는 모습은 미국에서 크리스마스 전날에나 볼 수 있는 풍경이고 밤 9시 10시에도 가게는 한창이다.

한국도 다른 나라처럼 불경기여서 실업률이 높고 사업이 안 된다고 해도 일 할 사람을 찾는 곳이 많다. 즉 3D 업종은 안 가려고 해서 20여만 명이 넘는 이주 노동자들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고 한다. 한국이 이렇게 잘 사는 때가 없었다. 경제만 아니고 정치적인 발언도 세계적이어서 한국이 의장국 자격으로 G20 회의가 서울에서 열리고 있을 때 나는 한국에 있으면서 자부심으로 뿌듯했다.

신앙의 선배들은 고향을 어떻게 대했을까? 크게 두 모델이 있는데 첫째는 아브라함이다. 75세에 고향을 떠난 이민자요 개척자로써 피눈물나는 노력을 100년간을 하면서도 고향을 생각해서 눈물 짖거나 되돌아 간 적이 없이 오직 그가 살고 있는 현장에서 신앙인으로 사는 데에 몰두하다가 그 곳에서 죽었고 또 그 곳에 장사되었다. 비슷한 사람 예레미야는 강조하기를 이민 갔으면 그곳에 정착하라는 것이다. 그 곳 사람과 결혼도 하고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살면서 그 나라가 잘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것이다. (렘29:5;-7)

두 번째 모델은 야곱이다. 그는 고향을 떠나 먼 타향에서 모진 고생과 천대를 받으면서도 수십 년 동안에 큰 부자가 되어 그 곳에서도 잘 살 수 있으나 그리운 고향을 잊지를 못해 처자식을 비롯해 무수한 짐승과 종들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사실 고향에는 자기를 죽이려는 형이 벼루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 위험을 감수하면서 갔다. 얼마 후 그는 다시 아들이 총리로 있는 애급으로 70명이나 되는 대 가족을 이끌고 이민을 가게되고 그 곳에서 살다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 때의 유언은 자기 시체만이라도 고향에 묻어 달라고 해서 그렇게 해드린다. 그는 고향을 너무도 사랑했다. 두 사람의 길이 다르나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는 어느 편이 좋고 나쁘다고 할 수가 없다. 필자는 아브라함의 길을 따라 긴장 속에서도 새로운 도전을 하며 힘차게 살면서 또한 아름다운 고향을 가슴에 안고 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