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어떤 사람은 성령의 은사를 많이 받은 사람도 있고 또 강한 능력을 행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 같은 경우는 왜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지 않을까요? 성령의 은사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일인가요?
A) 저의 신학생 시절의 얘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그 때가 1980년대 초였으니까 한참 우리나라 교계에 성령의 은사 받는 운동이 열풍처럼 번져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때 성령의 은사 받는 일과 관련하여 아주 유명한 한 기도원이 있었습니다. 이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면 얼마나 성령의 은사를 많이 경험하는지 심지어는 이 기도원에 오면 강아지까지도 방언을 받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그 때 거듭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성경에 대한 지식도 별로 없었고, 그저 하나님께 대한 뜨거운 열정만 불타오르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저는 주위 사람들의 권유에 따라 성령의 은사를 많이 체험해야겠다고 결심한 나머지, 신학교 4년 동안 방학마다 은사 받는 계획을 짰습니다. 1학년 여름방학에는 이 기도원에 가서 방언을 받고, 겨울방학에는 방언 통역을 받고, 2학년 때는 예언도 받고, 병 고치는 은사도 받고…, 이렇게 해서 계획을 세워놓고 보니 졸업할 때까지는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를 다 받을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물론 저의 이러한 계획이 얼마나 하나님의 의도와 동떨어진 것인지를 깨닫게 되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제 저는 어디에서나 또 누구에게나 힘주어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 또는 성령의 나타남은 우리가 기도해서 따내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당신의 뜻을 따라 나타내시는 전적인 성령의 주권적 역사라는 점을 말입니다.
어떤 미국인 선교사가 아프리카 오지에서 사역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가 사랑과 긍휼의 심정으로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는 그 선교사를 통해 수많은 원주민들의 질병과 영혼의 문제들을 기적적으로 치유하셨습니다. 놀라운 기적적인 사역이 계속되다가 얼마 후 이 선교사는 안식년을 맞아 고국인 미국에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를 순회하며 선교보고를 하는 가운데, 아프리카에서 일어났던 기사와 이적이 여기에서도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초자연적인 기적은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선교사는 심한 좌절감과 회의에 빠지게 되었는데, 나중에서야 자신의 실수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은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주권에 의해서 된다는 것이고, 또한 성령께서는 상황과 필요에 따라서 성령의 나타남을 주실 수도 있고 또 안 주실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가 후에 안식년을 마치고 자신의 선교지로 돌아가서는 전에 나타나던 성령의 나타남을 경험하게 된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령의 나타남을 기대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사역 속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개인적으로 주어지는 성령의 지시 또는 교훈을 말하는데, 교회의 초기 활동을 기록한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성령의 직접적인 인도하심의 많은 사례가 있음을 봅니다. 그 중에서 몇 가지 예만 든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성령께서 빌립 집사에게 지시하여 복음을 전하게 하였습니다(행 8:26-29). 특히 성령께서는 빌립에게 에디오피아 내시가 타고 가는 수레로 다가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구체적인 인도하심을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다메섹 도상에서 하늘의 빛을 받고 쓰러진 사울에게 다음과 같은 분명한 지시를 주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행 9:4-6). 이 당시 사울은 자신에게 일어난 충격적인 일로 인하여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이 일 이후 계속 바울, 즉 거듭난 이후의 사울의 삶속에 주권적으로 인도하심을 주셨고, 바울은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만 따라 복음을 전했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성령께서는 제자 아나니아에게 환상 중에 말씀을 주고 받으신 후 행할 일을 일러주셨습니다(행 9:10-16). 당시 아나니아는 크리스천들을 박해하는 사울에 대한 나쁜 소문을 익히 들었던 차라 이 점에 대해 성령께 말씀드렸지만, 성령께서는 오히려 사울이 앞으로 얼마나 주의 복음을 위해 일할 것인가에 대한 예언까지 주심으로 아나니아에게 확신 가운데 행하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 때가 다메섹 체험 이후 성령께서 사울에게 말씀하신 바로 그 때였으니, 성령께서는 역시 당신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환상 중에 고넬료에게 지시하여 시몬 베드로를 청하라고 하셨고(행 10:3-6), 역시 비슷한 시간 베드로에게도 고넬료를 만날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행 10:19-20). 특히 성령께서는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시고 그 환상의 의미를 풀어주심을 통해, 베드로가 전부터 갖고 있던 유대 민족주의적인 편견을 깨고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져야 할 깨달음을 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갖고 있는 어떤 편견이나 선입견을 깨뜨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절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초월적으로 일하시면 이 모든 일도 쉽게 해결되는 것을 우리의 사역 속에서 많이 경험하곤 합니다.
옥에 갇힌 베드로가 기적적으로 감옥에서 풀려날 때에도 먼저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행 12:7-9). 이러한 일은 매우 신기한 일로 여겨지지만, 성령께서 인도하심을 주시고 또 우리가 그 인도하심에 따르기만 하면 당연하게 나타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이 어떻게 주어지느냐 하는 것이고 또 우리가 그 인도하심을 잘 이해하고 따르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전히 여러분에게 질문이 남을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가 성령의 주권적 나타남으로 비롯된다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성령의 은사를 더 많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냐고요? 이 질문에 대해 저는 가능한 한 가장 짧은 답변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주님이 하라고 하신 일을 기쁨과 성심으로 감당하면서, 영적인 사역에 있어서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간구하는 일입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2장에 나타난 아홉 가지 성령의 나타남은 성령의 인도하심만 있다면 그 누구에게든 나타날 수 있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다 한 성령이 나타내시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높이며 성실하게 자신의 사역을 감당하는 이들을 통해 은사와 능력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잘 이해하신다면, 여러분 중의 그 누구도 예전에 제가 신학생 때 실수했던 것 같은 오해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A) 저의 신학생 시절의 얘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그 때가 1980년대 초였으니까 한참 우리나라 교계에 성령의 은사 받는 운동이 열풍처럼 번져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때 성령의 은사 받는 일과 관련하여 아주 유명한 한 기도원이 있었습니다. 이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면 얼마나 성령의 은사를 많이 경험하는지 심지어는 이 기도원에 오면 강아지까지도 방언을 받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그 때 거듭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성경에 대한 지식도 별로 없었고, 그저 하나님께 대한 뜨거운 열정만 불타오르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저는 주위 사람들의 권유에 따라 성령의 은사를 많이 체험해야겠다고 결심한 나머지, 신학교 4년 동안 방학마다 은사 받는 계획을 짰습니다. 1학년 여름방학에는 이 기도원에 가서 방언을 받고, 겨울방학에는 방언 통역을 받고, 2학년 때는 예언도 받고, 병 고치는 은사도 받고…, 이렇게 해서 계획을 세워놓고 보니 졸업할 때까지는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를 다 받을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물론 저의 이러한 계획이 얼마나 하나님의 의도와 동떨어진 것인지를 깨닫게 되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제 저는 어디에서나 또 누구에게나 힘주어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 또는 성령의 나타남은 우리가 기도해서 따내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당신의 뜻을 따라 나타내시는 전적인 성령의 주권적 역사라는 점을 말입니다.
어떤 미국인 선교사가 아프리카 오지에서 사역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가 사랑과 긍휼의 심정으로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는 그 선교사를 통해 수많은 원주민들의 질병과 영혼의 문제들을 기적적으로 치유하셨습니다. 놀라운 기적적인 사역이 계속되다가 얼마 후 이 선교사는 안식년을 맞아 고국인 미국에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를 순회하며 선교보고를 하는 가운데, 아프리카에서 일어났던 기사와 이적이 여기에서도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초자연적인 기적은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선교사는 심한 좌절감과 회의에 빠지게 되었는데, 나중에서야 자신의 실수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은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주권에 의해서 된다는 것이고, 또한 성령께서는 상황과 필요에 따라서 성령의 나타남을 주실 수도 있고 또 안 주실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가 후에 안식년을 마치고 자신의 선교지로 돌아가서는 전에 나타나던 성령의 나타남을 경험하게 된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령의 나타남을 기대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사역 속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개인적으로 주어지는 성령의 지시 또는 교훈을 말하는데, 교회의 초기 활동을 기록한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성령의 직접적인 인도하심의 많은 사례가 있음을 봅니다. 그 중에서 몇 가지 예만 든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성령께서 빌립 집사에게 지시하여 복음을 전하게 하였습니다(행 8:26-29). 특히 성령께서는 빌립에게 에디오피아 내시가 타고 가는 수레로 다가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구체적인 인도하심을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다메섹 도상에서 하늘의 빛을 받고 쓰러진 사울에게 다음과 같은 분명한 지시를 주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행 9:4-6). 이 당시 사울은 자신에게 일어난 충격적인 일로 인하여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이 일 이후 계속 바울, 즉 거듭난 이후의 사울의 삶속에 주권적으로 인도하심을 주셨고, 바울은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만 따라 복음을 전했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성령께서는 제자 아나니아에게 환상 중에 말씀을 주고 받으신 후 행할 일을 일러주셨습니다(행 9:10-16). 당시 아나니아는 크리스천들을 박해하는 사울에 대한 나쁜 소문을 익히 들었던 차라 이 점에 대해 성령께 말씀드렸지만, 성령께서는 오히려 사울이 앞으로 얼마나 주의 복음을 위해 일할 것인가에 대한 예언까지 주심으로 아나니아에게 확신 가운데 행하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 때가 다메섹 체험 이후 성령께서 사울에게 말씀하신 바로 그 때였으니, 성령께서는 역시 당신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환상 중에 고넬료에게 지시하여 시몬 베드로를 청하라고 하셨고(행 10:3-6), 역시 비슷한 시간 베드로에게도 고넬료를 만날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행 10:19-20). 특히 성령께서는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시고 그 환상의 의미를 풀어주심을 통해, 베드로가 전부터 갖고 있던 유대 민족주의적인 편견을 깨고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져야 할 깨달음을 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갖고 있는 어떤 편견이나 선입견을 깨뜨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절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초월적으로 일하시면 이 모든 일도 쉽게 해결되는 것을 우리의 사역 속에서 많이 경험하곤 합니다.
옥에 갇힌 베드로가 기적적으로 감옥에서 풀려날 때에도 먼저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행 12:7-9). 이러한 일은 매우 신기한 일로 여겨지지만, 성령께서 인도하심을 주시고 또 우리가 그 인도하심에 따르기만 하면 당연하게 나타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이 어떻게 주어지느냐 하는 것이고 또 우리가 그 인도하심을 잘 이해하고 따르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전히 여러분에게 질문이 남을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가 성령의 주권적 나타남으로 비롯된다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성령의 은사를 더 많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냐고요? 이 질문에 대해 저는 가능한 한 가장 짧은 답변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주님이 하라고 하신 일을 기쁨과 성심으로 감당하면서, 영적인 사역에 있어서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간구하는 일입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2장에 나타난 아홉 가지 성령의 나타남은 성령의 인도하심만 있다면 그 누구에게든 나타날 수 있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다 한 성령이 나타내시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높이며 성실하게 자신의 사역을 감당하는 이들을 통해 은사와 능력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잘 이해하신다면, 여러분 중의 그 누구도 예전에 제가 신학생 때 실수했던 것 같은 오해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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