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만 이뤄진다’ - 아시안계 미국인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새미 리(Sammy Lee)의 삶이 웅변하는 교훈이다.

한인 2세인 그는 신장 5피트 2인치(155 센티미터)의 단신이다.

그는 1948년 런던올림픽에서 남자 다이빙 10미터 플랫폼 종목과 3 미터 스프링보드 종목에서 각각 금메달과 동메달을 땄고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는 10 미터 플랫폼에서 또다시 금메달을 딴 ‘작은 거인’이다.

그의 올림픽 2연패는 남자 다이빙 분야에서 처음이었고 32세의 나이로 참가한 1952년 올림픽에서 그는 최고령 금메달리스트였다.

새미 리는 또 의사다. 이비인후과 전문의인 그는 올림픽에 출전하기 전 의사가 되어 보기드문 ‘의학박사 금메달리스트’였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와 의사 - 어려서부터 가진 그의 꿈이었다.

1932년 12세의 새미 리는 동네 공용 수영장 밖에서 수영하는 백인 아이들을 철조망 사이로 지켜보았다. 인종차별로 유색인종은 수요일 하루만 수영장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새미 리의 부러운 눈초리는 다이빙보드에서 다이빙하는 소년들에게 쏠렸다. 공중으로 올라갔다 물 속으로 떨어지는 그들을 바라보며 '저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수요일. 제일 먼저 수영장에 들어간 새미 리는 다이빙보드에 올라가 그들처럼 했다. 흑인 친구의 도움으로 더 높이 올라가 한번 반을 회전하며 물 속으로 떨어졌다. 그 후 다이빙은 새미 리의 전부가 되었다.

식당 운영하던 아버지 ‘미국에서는 뭐든 이룰 수 있다’ 격려

하지만 더 나은 삶을 위해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온 그의 아버지는 새미 리가 의사가 되기를 바랬다. 그의 아버지는 식당을 운영하며 번 돈을 은행에 저금하고 받은 팁은 빈 구두박스에 모았다. 하나뿐인 아들의 미래를 위해서였다. 그러면서 아들에게 늘 하는 말은 이것이었다. “미국에서는 너가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이룰 수 있다”(In America you can achieve anything if you set your heart to it)”

그는 이 말에 다이빙 종목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수요일마다 수영장에 가 다이빙을 독학하다 ‘짐 라이언’이라는 다이빙 코치를 만났고 체계적으로 다이빙을 배우기 시작했다. 연습장은 라이언 코치 집 뒤 뜰.

수요일만 수영장을 갈 수 있어 나머지 날은 땅에 큰 구멍을 파 모래를 넣어 만든 모래더미 위로 뛰어내리며 다이빙 연습을 한 것이다. 모래더미로 뛰어내릴 때마다 귀속으로 모래가 들어갔고 비가오는 날이면 물 먹은 모래로 수영복이 무거웠다. 잘못 떨어져 이마가 찢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매일 연습했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새미 리는 공부도 잘해 친구들 가운데 ‘가장 성공할 것 같은 사람’으로 선정되었고 처음으로 유색인종 학생회장이 되기도 했다. 이런 탁월함으로 그는 LA 악서덴탈(Occidental) 대학에 전액장학금을 받고 입학한다.

하지만 자신의 고등학교 졸업축하 파티장에 유색인종이라고 못들어가는 현실에 분노하며 그는 아버지의 말을 믿지 못했다. “어떻게 아빠는 이런 미국에서 내가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이룰 수 있다고 말하는거지?”

새미 리는 다이빙으로 그런 인종차별의 벽을 뚫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먼저 뚫어야할 벽은 아들이 의사가 되기를 바라는 그의 아버지였다.

하루는 식당에서 무례한 손님에게 당하고만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새미 리는 왜 가만히 있었냐고 따졌다. 그의 아버지는 “네가 의사가 되면 내가 받을만한 존경을 받는다”며 “미국에서는 너가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자식을 기대하고 사랑하는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었다.

새미 리는 이를 계기로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며 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고 다이빙 연습을 하겠다고 마음먹는다.

세계대전으로 올림픽 챔피언 꿈 산산조각 실망

1940년 헬싱키 올림픽이 목표였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발발로 올림픽이 연달아 취소되며 기회 자체가 사라져버렸다. 새미 리는 당시 올림픽 챔피언이 되겠다는 자신의 꿈이 산산조각났다며 크게 실망했다.

설상가상으로 1943년 새미 리의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시며 그는 절망 그 자체였다.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아들의 미래를 위해 팁을 모아 둔 아버지의 구두상자였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꿈이 가득한 그 상자를 바라보며 새미 리는 아버지의 꿈 만큼은 무너지기를 원하지 않았고 1946년 의사가 되었다.

의사로 활동하면서도 그는 다이빙에 대한 미련은 버리지 못했다. 병원 근처 수영장에서 근무 후 다이빙 연습을 했고 1946년 전국 다이빙 챔피언쉽에서 우승하며 다시한번 올림픽 챔피언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목표는 1948년 런던 올림픽. 28세라는 다소 고령의 나이에 올림픽에 첫 출전한 그는 한국이민자의 아들이 미국을 대표해서 올림픽에 나온 것 자체에 감격했다.

첫 경기는 3미터 스프링보드. 값진 동메달을 땄다. 하지만 그의 주종목은 10미터 플랫폼. 그는 공중 3회전 반이라는 고난위 기술을 선보이려고 했다. 다이빙을 위해 플랫폼 위에 선 새미 리. 이곳에서 다이빙을 하고 점수가 나오기 까지의 16초를 위해 그는 지난 16년을 달려온 것이다. 이런 까닭에 그의 삶을 아이들에게 소개한 책의 제목이 ‘16초를 위한 16년’(Sixteen years in sixteen seconds)이다.

16년을 기다려 온 16초...마침내 금메달 단상으로

새미 리는 다이빙 도약을 했고 16초 뒤 최고점수로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가 되었다. 마침내 그의 꿈이 성취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시상식에서 수많은 관중들의 환호 속에서 들린 말은 아버지의 말이었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너가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이룰 수 있다”

그는 1952년 올림픽에서도 10미터 플랫폼 다이빙에서 금메달을 따 올림픽 2연패를 했고 1953년에는 미국 아마추어 운동선수에게 수여하는 가장 영예로운 상인 제임스 설리반 상을 받았다. 아시안계 미국인으로는 최초다.

다이빙 코치로도 활약하면서 벱 웹스터, 그레그 루가니스 등 미국 다이빙 남자선수들이 금메달, 은메달을 딸 수 있도록 지도했다.

새미 리는 2008년 8월 북경 올림픽을 맞아 가진 한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아무도 당신의 꿈을 빼앗가지 못하게 하라. 꿈이 없다면 당신은 목표가 없다는 것이다(Don’t let anybody ever take away your dream. If you don’t have that, you don’t have a goal)"라고 말했다.

올해 90세의 새미 리는 자신의 아버지처럼 꿈을 꾸라고, 그리고 어떤 어려움에도 그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케이아메리칸포스트 제공(www.kamericanpos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