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움 가운데 있는 분들에게 위로하기 위해 꺼낸 말이 오히려 비수처럼 마음에 상처를 만들어 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처하면 우리는 보통 무슨 말이 좋은지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기에는 어색해서 입을 엽니다. 그럴 경우, 필경 실언이 됩니다.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자신이 믿는 바에 대한 확신이 강한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무슨 일에나 정답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여,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만나서 자기 믿음에 따라 훈계를 하거나 조언을 합니다. 하지만 그 말은 어려움을 당한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 줍니다.

< Handbook for Those Who Grieve >라는 책에 보니, 어려움을 당한 사람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의 목록이 나와 있습니다. 도움이 될 듯 싶어 여기에 옮겨 적습니다. (pp. 40-41)

“당신이 어떻게 느낄지 압니다”
“정신 바짝 차리게. 자네가 이렇게 심하게 받아들일 줄 상상도 못했어.”
“지금은 무너질 때가 아니야.”
“아이들을 생각하여 강해져야 해.”
“침착해. 다 괜찮아질거야.”
“자, 자, 이제 눈물은 그만!”
“왜 자꾸만 지나간 일을 떠올리는데. 그래 봐야 상황이 나빠질 뿐이야.”
“왜 내게 연락하지 않았어?”
“모든 것은 위장된 축복이야.”
“나는 그 병원 [혹은 의사, 혹은 무엇이었든]을 믿지 않았어.”
“너는 젊어. 다시 결혼하면 되잖아.”
“계속 살아가야만 해.”
“자네가 겪고 있는 고통이 어떤지 다 알아.”
“그래도 나보다는 나아. 내 어머니는 더 젊었을 때 돌아가셨어.”
“이젠 다 끝났으니 마음 편히 가져. 그동안 고생했어.”
“차라리 이 편이 나아.”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하셔서 빨리 데려가셨나봐.”
“강해져야 해. 가정을 책임질 사람이 자네 밖에 없잖아.”

이 리스트를 보고 가책을 느끼는 분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이 대부분 이 리스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교우께 들은 말입니다. 그분의 모친께서 아흔이 넘어 돌아가셨는데, 누군가가 “아흔이 넘어 돌아가셨으니, 이건 호상이야. 슬퍼할 거 없어”라고 하셨답니다. 그런데 그것도 듣기에 좋지 않더랍니다. 그러니 결론은 뭡니까? 그런 상황에서는 될 수 있는대로 말을 아끼라는 것입니다. 눈 빛으로 혹은 표정으로 말하면 충분합니다. 침묵은 금이라는 말이 이 경우에 특별히 진리인 것 같습니다. (2010년 5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