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한인 타운의 번영

한인 타운은 뷰포드 하이웨이(Buford Highway)를 중심으로 1990년 대에 들어서면서 제과점, 육아원, 미용실, 흑염소 집 등 다양한 업소들이 등장하여 활기를 띠어 가기 시작했다. 1989년 2월 6일 발행된 한국일보(시카고 판)에 애틀랜타 한인 상공회의소 홍재결 회장의 신년사가 게재되어 있는데, 신년사를 ‘뷰포드에 한인 타운을 건설하자’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다. 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도 이제는 미국을 외국으로 생각하지 말고 이 땅에 정착한 이상 이 땅의 주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이 땅에 대한 애착도 가지고 미국의 경제 발전에도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 땅의 주인이라는 자부심과 인식을 갖기 위해서 금년에는 한인 상가가 제일 많이 밀집되어 있는 뷰포드(Buford Hwy.)를 중심으로 한인 타운을 건설하고 한인타운의 팻말을 자랑스럽게 쳐다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1993년 꿈나무 재능 교실(원장 이진숙), 샛별 유아원(원장 홍연표 목사), 꽃동네 미술학원(원장 김성실) 등이 유아 및 어린이 대상 교육장으로 비슷한 시기에 문을 열었고, 뷰포드 선상에 일식과 한식을 겸한 유끼신정(대표 이원섭), 아시아나 가든(대표 심상국), 해운대갈비(대표 차덕용) 등 요식업소들이 속속 개점을 해 뷰포드 선상을 중심으로 애틀랜타 인근 지역 한인들이 밀집하는 한인 타운이 번영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들어서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개최 확정 이후 애틀랜타 경제성장이 예상됨에 따라 애틀랜타가 새로운 주거 지역과 투자 지역으로 각광받게 되어 미국내 한인 인구가 대거 유입되면서 한인 타운에 한인 상가가 크게 늘어나게 된 것이다. 애틀랜타 한인 타운 내 한인 업소는 1996년 올림픽 특수라는 기대 심리에 편승하여 상권이 확대되어 1992년 말부터 한달 평균 10여개씩 새로 생겨났다고 전해지고 있다. 1995년 초까지만 해도 450~500개 정도의 한인 업소가 자리하고 있었으나 1996년 6월에는 약 600개로 늘어났다.

한인타운의 상권은 뷰포드 하이웨이를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셀로포드 로드, 불쪽으로는 오클리프 로드까지, 동쪽으로는 챔블리터커 로드, 서쪽으로는 피치트리 인더스트리얼 블루버드까지만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북쪽으로 영역이 넓어지면서 지미카터 블루버드를 넘어 점차 노크로스의 비버루인 로드까지로 확장되고 동양 파머스 마켓이 들어선 이후 지미카터 블루버드 지역과 챔블리 터커, 노크로스 터커 로드 교차지역도 한인 타운 상권에 포함되었다. 이러한 한인 타운의 상권 확대는 한인 타운의 번영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뷰포드 선상의 한인타운의 활기는 한인 인구 증가에 힘입어 한인 상가들이 늘어나면서 비롯된 것으로 1990년대 이후부터는 업종의 다양화 현상이 일어났다. 요식업소들과 대형 식품점들이 늘어나고 마샬 미용실(1991년 개점), 준미용실(1991년 개점), 태양 미용실(1993년 개점), 르봉 미용실(1993년 개점) 등 다수의 미용실이 개설되었다. 또한 1993년 뉴욕제과 개업 이후 가나안제과, 고려당 등 한국 제과점이 개업하였고 아시아 당구장, 한국 흑염소, 골프웨어하우스, 한국식 경양식집 카페모네 등이 등장하였다.

이 밖에 스타 노래방에 이어 뉴서울노래방 등이 개장하여 문화와 휴식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가족이나 단체 모임에 각광을 받기도 했다. 한편 한인 상가 형성의 효시라 할 수 있는 파인트리 플라자가 1991년 개점한 데 이어 1991년 코리아타운 플라자가 한국식 지붕 등 한인 상가로서의 특색을 지니고 개점하였고, 다우타운에서 성업 중이던 JC여행사를 비롯하여 준미용실, 나들이선물센타, 시온떡집, CJ임포트, 한국비디오, 롯데패션 등이 입주하였다.

뷰포드선상의 I-285 고속도로를 중심으로 내, 외곽 반경 1마일 이내에 위치한 상가들이 한인 타운의 중심지역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한인 업소 밀집 지역 뷰포드 선상의 상점 임대료 역시 빠른 속도로 상승하여 일명 '금싸라기 땅'으로까지 부릴 지경이 되기도 하였다. 1993년 기준으로 스퀘어피트(square ft) 당 뷰포드 선상 평균 연간 임대료가 12달러 선으로 1983년 4달러에 비해 10년 동안 약 3백 %가 인상되었다.(주간 동남부 1993년 10월 5일 자 인용)

파인트리 플라자의 경우 2천 스퀘어피트 이상의 장소를 임대한 경우 지난 1991년에는 스퀘어피트 당 연간 임대료 6달러 50센트 선에 계약을 맺어 업소를 운영해 왔으나 1992년에는 9달러, 1993년에는 12달러 선으로 2년 내에 1백 % 가까이 인상되었으며, 그나마도 신청자들이 임대 계약을 위해 예약 리스트에 올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파인트리 플라자의 맞은 편에 위치한 아시안 스퀘어의 경우도 1993년 완공하여 임대를 시작한 이후 6개월이 되기도 전에 90% 이상 임대가 완료되었는데 대부분 한인 상점이 들어갔고, 도라빌 플라자의 경우도 한인 상점 밀집 상가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임대료의 상승도 그 이후 한인 타운의 뷰포드 선상 밀집 현상을 분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한편 이러한 한인 타운의 번영을 반영하여 1993년 2월 19일 애틀랜타 라디오서울(대표 심중구)이 1993년 2월 19일 오전 9시 애국가를 시작으로 호출 부호 단파 FM95로써 10kw의 첫 단파를 성공리에 발사함으로써 애틀랜타 한인사회에 라디오 전파 시대가 개막되었다. 애틀랜타 다운타운을 중심으로 반경 70마일 이내를 가청 지역으로 삼은 라디오서울은 한국방송공사(KBS) 및 연합통신과 제휴하여 생생한 한국 소식은 물론 미국 소식, 교포 소식, 음악 프로, 연속극 및 교양 프로 등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하여 하루 14시간의 방송을 시작했다.

라디오서울을 처음 개국했던 심중구 사장은 라디오 개국 이전인 1988년부터 한미 TV방송을 운영해 오고 있었다. 한미 TV 방송국은 1988년 케이블 방송으로 시작하였으나 1991년 전파 방송 라이센스(UHF Channel 67)를 취득하고 방송국을 설치하여 1월 15일 첫 전파를 발사했으며, 1992년 말 예전 위치인 우드스탁(Woodstock)에서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노크로스 지역으로 타워 및 방송국을 이전하여 애틀랜타 인근 지역 한인들의 시청이 용이해졌다.

한미 TV방송국이 내보내는 전파의 확실한 시청 지역은 노크로스, 도라빌, 챔블리, 던우디, 스톤마운틴, 스넬빌, 라즈웰시 등이며 로렌스빌, 알파레타, 둘루스, 스머나 및 애틀랜타 다운타운 지역은 시청 가능 지역으로 별도의 실외 안테나를 설치하면 시청할 수가 있었다.

기쁨의소리, 교민의대변, 빠르고 정당한 보도, 알차고 유익한 방송 등을 기치로 내건 한미 TV방송은 매일 오전 7시부터 10시까지 방송하고 오후 11시부터 다음날 새벽 2시까지 재방송을 실시하였다. 초기 프로그램은 KBS 뉴스 위성 중계를 비롯하여 ‘남북의 창’ ‘바람은 불어도’ ‘빅 쇼’ ‘드라마 게임’ ‘열린 음악회’ 등 주로 KBS 프로그램으로 편성되었으며, 애틀랜타 한인 사회 소식인 'KBS 로컬 뉴스'와 일요일 종교 프로그램인 '설교 방송'이 방영되어 한인 영상 방송 시대를 개척하였다.

최초의 한인 은행 훠스트 인터컨티넨탈 은행이 2000년 2월 14일(월) 오전 9시 뷰포드 한인타운에서 첫 영업을 시작하였다. 동남부 최초의 한인 은행으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일하겠다는 홍승훈 은행장의 계획대로 이 은행은 많은 면에서 한인들의 편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국의 은행과 직접 계약을 맺어 한국으로 송금할 때 수수료를 절감할 수 있고, 시간도 단축할 수 있다.

비즈니스 체킹, 세이빙 어카운트, 비영리 어카운트, 노후 대책 어카운트, 학생 체킹 어카운트 등 다양한 상품이 마련되어 있고, 한국어 영어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직원이 상주하여 고객을 돕고 있다(주간 동남부 2000년 12월 22일~28일자 기사)(애틀랜타한인이민사 15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