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이 입적한 후, 그의 맑고 향기로운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 널리 알려지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든 참다운 삶에 대한 동경은 있는 법이어서, 아름답고 깨끗한 삶을 산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감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하지만, 누군가가 그렇게 살아 준 것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는 법입니다. 그래서 종교를 초월하여 수 많은 사람들의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애도의 물결 속에서 한 걸음 물러서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스스로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 ‘일부’ 기독교인들이 그들입니다. 그들은 팔짱을 끼고 애도의 물결을 지켜 보면서 “그는 과연 구원을 받았을까?”라고 묻습니다. 그들은 죽은 이의 삶이 남긴 교훈을 되새기는 일은 제쳐 두고, 스스로 심판자의 자리에 앉아 죽은 이의 구원 여부를 판단하는 일에만 마음을 둡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습니다.

첫째, “제발 그 버릇 좀 고치십시오”라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두고 이같은 질문을 제기하고 따지기를 좋아합니다. 그것은 죽은 사람에 대한 무례입니다. 또한 영적 교만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복음을 전하여 분명한 신앙 고백에 이르도록 도와야 하지만,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하나님께 그 사람에 대한 자비를 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둘째, “당신 자신의 구원을 더 걱정하십시오”라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예수께서는 영적 교만을 가장 큰 죄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첫째 된 사람이 꼴찌되고, 꼴찌 된 사람이 첫째 되는 일이 있을 것이며, 당신에게 “주여, 주여”라고 한다고 해서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며,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맺돌을 갈다가 한 사람만 데려감을 당하고 다른 사람은 그대로 남겨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구원에 대한 ‘자만’이 되면 안 됩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해 가야 합니다(빌 2:12).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죽음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돌아 보고 살피는 것이 마땅합니다.

지금은 반성의 시간입니다. 행위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받을만한 믿음은 행위로써 증명되어야 합니다. 누가 참다운 진리를 믿는 사람인지는 삶의 모습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구원’과 ‘천국’과 ‘영생’을 이야기하는 기독교인들이 ‘인연’과 ‘윤회’와 ‘열반’을 이야기하는 불자들의 삶에 비해 나은 점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믿는 복음의 진리는 죽고 나서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그 진가를 드러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진리로써 다른 사람의 구원의 여부를 판단하기를 그치고,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그 진리가 빛을 발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이 사순절에 우리가 더욱 기도하고 힘써야 할 기도 제목이라고 믿습니다.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2010년 3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