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국민들의 신분증에서 종교 표기란이 사라질 전망이다. 국민의 95% 가량이 무슬림인 터키에서 신분증에 기입하도록 해놓은 종교란은 기독교를 비롯해 소수종교를 믿는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일으켜 왔다.

유럽인권법원(ECHR)은 최근, 터키 신분증의 종교란은 인권 침해에 해당한다며 이를 삭제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터키 정부는 신분증에 종교를 명시하는 것을 둘러싸고 인권 침해 논란이 커지자, 지난 2006년부터는 종교란을 비워둘 수 있도록 기존 법안을 개정했지만, 유럽법원은 그것조차 인권 침해라는 판단을 내렸다. 이는 터키에서는 신분증 종교란에 ‘무슬림’으로 표기되지 않을 경우, 타 종교로 표기되어 있든 종교란이 비워져 있든 결국 차별을 피해가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터키개신교연맹(TPA)의 제카이 타냐르 회장은 법원의 이번 판결에 환영을 표시하며, “터키에서는 기독교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취직을 하지 못하거나, 다니던 직장마저 잃는 경우가 일반적”이라며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신분증에 종교를 드러내게 한 것은 사실상 이슬람 외에 다른 종교에 대한 차별을 허용하겠다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터키에서는 또한 같은 무슬림이라 하더라도 국민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수니파 무슬림이 아닐 경우 ‘무슬림’으로 표기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이번 판결도 시아파 이슬람의 한 종파로 터키에서는 이단 취급을 받는 알레비파 무슬림이 유럽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데 따른 것이다.

6대1로 이 무슬림의 손을 들어준 유럽법원은 비록 종교란을 공란으로 남겨 두는 것이 허용되고는 있지만, 신분증에 자신의 종교를 밝히도록 해놓은 것은 유럽인권헌장 6, 9, 12조에 각각 명시된 종교와 신앙의 자유와, 그 구체적인 적용, 그리고 종교에 따른 차별 금지에 위배되는 것이라며, 터키 국민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종교적 신념을 밝힐 것을 강요받지 않도록 터키 정부에 시정을 요구했다.

유럽법원은 유럽연합(EU)과는 다른 독자적 기구로, 유럽법원의 결정은 유럽위원회(EC) 회원국가에서 법적 효력을 지닌다. 터키는 유럽연합에는 가입되어 있지 않지만, 유럽위원회에 가입되어 있으며 따라서 이번 판결에 대해서도 상당히 수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레세프 타입 에르도간 터키 총리는, 현지 일간을 통해 “유럽법원의 결정과 뜻을 같이 한다”며 “그 결정은 비정상적이지 않으며, (종교란 삭제가) 크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고 밝혔다.

터키의 인권 변호사 오르한 케말 센기즈는 “유럽법원의 결정은 터키의 전체적인 종교자유 개선에 영향을 줄 것”이라며, “모든 터키인이 무슬림인 것은 아니며, 또 그래야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일깨우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한편, 터키에서 유럽법원의 판결을 받아들일시, 터키와 같이 신분증에 종교를 표기하고 있는 많은 다른 중동 국가들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특히 터키가 중동 지역에서 경제적·지정학적으로 지도 국가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지역 타 국가들에도 적지 않은 파급 효과가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휴먼라이츠워치(HRW) 중동 디렉터 존 스톡은 “현재 많은 중동 국가들이 법률상 신분증에 종교를 표기하도록 강요하고 있다”며 “이는 인권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심각하며, 특히 차별의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고 말했다.

그는 “비록 하루 아침에 변화를 기대하기는 힘들겠지만, 터키의 변화는 다른 중동 국가들에도 본보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현재 중동 국가에서 신분증에 종교 표기가 의무시되고 있는 대표적인 나라는 이집트로, 개인의 종교 명시에 대한 법적 강요는 이 나라의 체계적인 기독교 박해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