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촌불란지설(三寸不爛之舌)은 세치밖에 안 되는 짧은 혀를 가졌지만 뭇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대단한 언변의 소유자를 이르는 고사성어이다. 혹은 줄여서 삼촌설(三寸舌)이라고도 한다. 이 삼촌설의 대표격은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조(趙)나라 평원군(平原君)의 식객 모수(毛遂)나 한(漢) 나라의 장량(張良) 아니면 삼국지 연의에 나오는 모사 제갈량 정도이다.

오늘날도 삼촌설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여도 말 잘하는 사람들이 즐비하다. 직종으로 따진다면 단연코 목사라 할 것이다. 목사중에도 한국 목사들이 그 언변에 있어서 세계 일류가 아닐까 한다. 그중에서도 발군의 실력으로 소위 말 잘하는 목사들의 랭킹이 이미 세인입에 오르내린지 오래 되었다.

말 잘하는 것이야 어디 흉이 되겠는가마는 개중에는 청산유수로 말만 잘한다는 이 ‘만’자 하나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말 잘하는 것과 말만 잘하는 것은 글자 하나 차이에 불과하지만 그 이해에 있어서는 그 사람의 말이 설교(說敎)가 되는가 아니면 교설(巧說)이 되는가에 있으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어느 분은 아나운서보다 더 매끄럽게 말 잘하는 분이 있다 그분의 가계(家系)가 모두 언변의 탁월한 은사를 가졌으니 참으로 복을 많이 받은 분이 아닐 수 없다. 그분은 언어 구사에 있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그 말의 전달에 있어서도 고급이어서 도대체 “ 에 또. 음, 저..”등의 중단음이 없다. 타고난 언사에 노력까지 불사하니 타의 추종을 불허 할 터이다. 할 수만 있다면 나도 그의 설교 전달방법을 모방하여 둔설자(鈍舌者)의 설움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러나 그 말씀들이 “참 말은 잘하신다”는 감탄 뒤에 깔려 있는 무서운 질책이 기다리는 것이라면 “에 또 저 음”를 계속하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말 잘하는 것보다는 잘 말하는 쪽을 택할 것이다.

오늘에 필요한 것은 말 잘하는 설교 보다는 잘 말하는 설교가 필요한 때이다. “에 또 저 음” 이 들어가면 어떤가! 자신의 말들이 말 잘하는 언변으로 끝남이 아니라 조심성 있게 진실된 말이 되기를 원해서 말 잘해야겠다는 각오로 잘 말하는 것이 훨씬 아름다운 설교가 될 것이다.

잘 말한다는 것은 첫째 진실성을 내포한 말이다. 말 잘하는 사람이 다 정직한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잘 말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은 적어도 진실한 말을 하려고 애를 쓸 것이다.

둘째는 간절성을 가진다. 그래서 “내 입에 파수꾼을 세워주소서.” 간절하게 기도하게 된다. 잘 말하는 것은 입술만이 동동 떠있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말하는 사람이다. 비록 경직되어 제스츄어 하나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다 하여도 잘 말하는 사람은 그 서있는 자세에서부터 간절함이 전달된다. 잘 말하지 못하겠다면 차라리 말을 아끼는 것이 오히려 잘 말하는 지름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