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란 어떻게 설명하기가 어려울 만큼 신비한 존재이다. 왜냐하면 한번 지나간 시간은 돌아 올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그 시간 안에서 어떤 연기를 펼쳤느냐에 따라 시간을 사용한 대가를 지불한다. 옳게 시간을 쓴 사람에겐 복과 상급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에겐 준엄한 대가를 경험케 한다. 아무튼 사람이 원하든 원치 않던 시간의 사용은 언제나 책임을 묻는다. 그 만큼 시간은 순간순간 심판하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어떤 의미론 시간이란 단순한 물질 자체가 아닌 것은 틀림이 없다. 만일 그저 물질적 존재라면 시간이 인간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시간이란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물이면서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책임을 물으시는 도구 같기도 하다. 책임을 묻는 도구? 그렇다.

사도 바울은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라는 고백을 했다. 겉사람이 후패해지는 것, 시간이란 함수가 인간에게 대입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은 늙음일 것이다. 육체적인 한계 안에 갇힌 인간의 모습은 후패로 나타나나 그 보상은 한계 주어진 시간 안에 어떤 연기를 했느냐에 따라 속사람의 새로움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상해 주신다. 그럼에도 늙은 애가 많아 보일 때가 있다. 쉽게 섭섭해 하고, 고집은 황소고집처럼 강해지고, 양보가 힘들어지는 유연함이 사라져 가는 현상엔 주어진 인생이란 시간 속에 자기 성찰이나 겸손이 없이 언제나 감정에 자신을 방임해 버린 삶을 살아 왔기 때문이 아닐까 스스로 조심해 진다. 그래서 성화라는 과정을 온전히 경험하며, 희생과 겸손의 덕을 알고 살아내는, 쉽게 들내며 감정에 지배되어 우쭐거리며 타인의 모습 속에 자기에 대한 관심만을 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의 관심과 사랑이 타인의 삶속에 투영되어 그리스도의 빛이 드러나도록 살아감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시간이란 선물이 아닐까 여겨 봄에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기를 보기란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을 해 본다. 언제나 자기로 꽉 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주어진 시간 속에 어떻게 자기를 위해 투자를 하고, 남을 위해 관용할 줄 아는 지혜가 요구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신비를 알고자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자기 자신을 성장 시켜야 함을 요구 받는다. 역시 발견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유약함을 안다면 하늘 지혜로 채움 받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가져 본다. 만일 인간이 시간의 신비를 안다면 이는 분명 보통 지혜자가 아닐 것 이란 생각을 해본다. 그런 면에서 인간이란 시간 앞에서 윤리적 존재로 있어야 함을 느끼게 한다. 시간을 바른 삶으로 채웠는가에 대한 책임을 물음 받기 때문이다. 책임에 대한 질문 앞에 서 있는 존재, 만일 인간이 이웃의 집에 있는 나무를 쓰러 뜨려 버렸다면 거기엔 책임짐을 묻게 된다. 그렇지 않고 번개가 나무를 쓰러 드렸다면 책임을 묻질 않듯이 인간이란 그 시간 안에 행한 행위에 대한 책임은 늘 있게 마련이다. 그런고로 인간은 시간을 사용할 자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책임이 있음을 안다면 이는 깨어 있는 사람일 것이다. 아울러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법에 대한 책임을 질문 받는다. 인간 앞에서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아온 삶에 대한 책임을 묻음 받는다면, 아말렉 족속이 진멸 당하듯, 인간의 파국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덧입어 살 수 밖에 없음을 고백케 한다. 결국 시간 안엔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심을 성도라면 누구라도 경험치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능력 안에서 시간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시간을 사용함에 책임을 요구 받지만, 아울러 그 책임을 다 감당 할 수 없는 유약한 존재인 인간에게 주시는 용서와 사랑이 함께 존재하는 시간을 순간순간 경험하며 살아가는 존재,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는 인간은 없는 셈이다. 특히 성도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