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는 ‘NQ’(Network Quotient, 공존지수) 시대라고 말한다.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서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유익을 위해 희생하는 공존능력이 높을수록 쓰임을 받는다고 한다. NQ정신은 한국선교에 있어서 더욱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세계에서 두번째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여 선교 강대국을 이루었지만 여전히 연합과 팀워크가 아킬레스건이다. 한국선교사가 중도탈락하는 첫번째 이유가 ‘동료 선교사와의 갈등’인 것을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다. 외부와의 연합에 앞서 자체 팀워크조차 힘든 것이 한국선교의 현 주소이다. 2만 명이 넘는 선교사를 파송하는 한국교회는 양만 추구하지 말고 이제부터 각 선교단체간의 연합을 모색할 때이다.

우리는 그 지혜를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에서 찾을 수 있다. 2010년은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가 열린 지 100주년이 되는 축복과 감사의 해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영국 에딘버러에서는 2010년 6월 2일부터 6일까지 선교대회를 개최해 학술연구와 축제를 열 계획이고, 한국에서도 올해 6월 22일부터 25일까지 한국대회를 개최하려고 이미 발기인 모임을 가졌고 준비 중에 있다.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의 핵심인물은 존 모트(John R. Mott, 1865-1955)이다. 그는 감리교 평신도로서 학생자원선교운동(SVM)과 YMCA의 의장을 맡아 세계여행을 두 번씩이나 하면서 당시 세계선교의 흐름과 방향에 눈을 뜨게 되었고 경쟁을 뛰어넘어 연합과 일치만이 살길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에딘버러대회를 성사시키기 위해 무려 280만km를 여행하였는데 그 거리가 자그마치 지구를 68바퀴나 돌 정도였다고 한다.

존 모트는 열정의 메이커였다. 한 예로 그는 한국을 두 번이나 방문하였는데 특히 1907년 1월부터 4월까지 한국을 방문하면서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렸던 평양대부흥운동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 때 모트는 “한국은 동양의 기독교 국가가 될 것이다”고 예언하였는데 그의 말은 옳았다. 1910년 6월 14일부터 23일까지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세계선교사대회가 열리면서 모트의 비전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참석한 대의원도 1천2백여 명이 등록하여 성황리에 개최되었고, 선교회나 선교단체도 무려 160개나 참석하여 큰 호응을 보였다.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 당시 대회장 모습.

감사한 것은 한국대표도 15명이나 참석해 초기 한국교회의 선교를 상세하게 보고 한 것이다. 이 때 한국은 기독교가 소개된 지 25년 밖에 안 되는 변방의 나라였지만 선교 열매는 탁월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마포 삼열, 언더우드, 게일 선교사 등이었다. 사실 에딘버러대회가 개최되기 전에는 간헐적으로 선교대회가 여러 지역에서 열렸지만 세계적인 대회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최초의 선교대회는 알렉산더 더프(Alexander Duff)가 1854년 뉴욕 대회를 개최한 것이고, 그 이후 1860년에는 리버풀 대회가, 1888년에는 런던 대회가 열리다가 1900년에는 좀 더 큰 규모의 선교대회가 뉴욕에서 열렸다. 이 대회는 ‘에큐메니칼 선교사대회’라 불리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3천 명의 대의원이 참석하였고, 250개 이상의 선교단체가 동참하여 역대 최고의 선교대회로 치러졌기 때문이다. 사실 1900년 뉴욕 대회가 큰 대회로 치러졌지만 너무 성급하게 진행되다 보니 예상했던 것보다는 큰 열매를 거두지 못했다.

1900년 뉴욕대회가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06년 초 스코틀랜드 연합자유교회 리빙스톤선교회의 명예 사무총장인 페어리 댈리(Fairley Daly) 목사가 미국장로교해외선교회 사무총장인 로버트 스피어(Robert E. Speer)에게 편지를 보냈다. 댈리 목사는 미국장로교해외선교회가 주축이 되어 여러 개로 분산되어 있는 대회를 하나로 묶어 선교사대회를 열어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확답을 받았다.

▲에딘버러 뉴칼리지 현 외부 모습.
그래서 1910년 최초로 세계선교사대회를 미국장로교해외선교회가 주축이 되어 개최하기로 하고 첫 모임을 1906년 11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우(Glasgow)에서 가졌다. 1907년 6월 12일에 37개의 선교단체가 동참할 것을 표시하였고, 이 때 실행위원회가 구성되어 두 명을 임명하였는데 스코틀랜드 연합자유교회의 해외선교회 사무총장인 제임스 뷰캐넌(James Buchanan)과 스코틀랜드교회 해외선교회 사무총장인 완(A. B. Wann)이었다. 이후 모임에서 실행위원회가 좀 더 구체적으로 보강되어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를 착실하게 준비하였다.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의 실행위원회에서는 뉴욕 대회의 ‘선교동원’ 차원처럼 참석자들로 하여금 선교사역에 관심을 갖게 하는 모임만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그들은 선교사리더 중심의 분과위원회를 구성하여 선교지에서 실제적으로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토론하는 모임을 가지려 했다.

그들은 대회 목적을 비기독교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한정 짓고 세 가지 의미가 충족되기를 바랐다. 첫째는 교회로 하여금 모든 나라에 복음 전하는 일에 헌신토록 눈을 뜨게 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이러한 과업에 크리스천들이 연합의 정신으로 참여하는 것이며 셋째는 선교사대회가 교회의 삶을 풍요롭게 하며 새롭게 하나님을 발견토록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교전략지역도 인도, 극동지역(한국, 중국, 일본, 몽골 등), 이슬람권으로 제한하고 이들 지역의 선교사들로부터 선교보고를 받고 함께 토론하여 복음의 접촉점을 찾아내려고 하였다.

종전의 선교사대회와는 달리 에딘버러대회는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교단을 초월하여 서로 연합하였고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준비되었다. 사실 이 대회는 윌리암 케리가라 더 이상 경쟁하지 말고 연합해야 상생할 수 있음을 깨닫고 초교파적인 에큐메니칼 선교대회를 1810년 남아공 케이프타운(Cape Town)에서 열기로 제의한지 꼭 100년 만에 이루어졌다. ‘경쟁’ 선교를 뛰어넘어 ‘연합’과 ‘일치’를 추구하는 세계최초의 선교사대회가 1910년 에딘버러에서 열린 것이다.

현대선교운동의 아버지인 윌리암 케리(William Carey)는 ‘경쟁’ 선교와 ‘중복’ 사역은 선교를 파탄에 이르게 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사도 바울 역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라”고 말한 것처럼 선교사역에 있어서 연합은 필수적이다. 한국교회가 선교강대국으로 발돋움하면서 기억해야 할 것은 각 교단선교회와 전문선교단체가 지나친 사역의 중복과 경쟁을 피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지혜를 1910년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열렸던 제1차 세계선교사대회에서 확인할 수 있다.(계속)

1. 경쟁을 뛰어넘어 함께 연합하는 선교사대회
2. 세계복음화를 꿈꾼 존 모트
3. 에딘버러대회에서 한국선교를 보고한 마포 삼열 선교사
4.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의 교훈


안희열 교수
침례신학대학교 선교학 교수
세계선교훈련원(WMTC) 원장
한국복음주의선교신학회 수석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