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7월 7일, 마틴 루터 킹이 이끈 흑인과 공산주의자들의 ‘민권운동’에 반격을 가하고자 병력을 소집한 KKK단 일파 ‘백색 기사단’은 출정식에 앞서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린다. “KKK 단원인 우리가 언제나 그대와 위대한 우리나라를 위해 굳게 설 수 있도록 확신과 용기를 갖게 하소서… 모든 일에서 그대를 영화롭게 하려 여기에 모인 우리를 축복하소서.” 이후 민권운동가들을 상대로 성전(聖戰)을 선포한 이들은 석 달이 채 안돼 민권운동에 종사하던 세 사람을 처형한다.

<세상을 바꾸는 작은 예수들(Rejesus: A Wild Messiah for a Missional Church, 포이에마)은 이렇듯 ‘만물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해하고 믿는’ 우리가 KKK단처럼 비난받아 마땅한 인물들과 같은 신앙을 갖고 있는 데 대한 당혹감에서 출발한다. KKK단 뿐만 아니다. 가까이는 한 입으로 예수를 말하고 다른 입으로는 인종차별적 발언을 서슴없이 했던 나치 독일 당시 루터교인들부터, 11-13세기에 걸친 십자군 전쟁의 주도자들, 16세기 멕시코와 페루를 정복한 스페인 정복자들도 극단적이긴 하지만 마찬가지 부류의 사람들이다.

저자들은 이러한 극단적인 예로 KKK단과 기독교를 동일시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지만, ‘예수’의 이름을 내거는 종교와 예수라는 이름 사이의 불연속성은 특정 교회나 교단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고 진단한다. 이 책의 저자는 <새로운 교회가 온다>를 공저한 마이클 프로스트(Michael Frost)와 앨런 허쉬(Alan Hirsch)다.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저자는 ‘교회가 예수에게로 돌아가는 문제’를 다룬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와는 약간 다른 예수다. 저자에 따르면 교회는 이제까지 그리스도를 딴 세상 인물처럼, 심지어 천상의 존재처럼 보이게 했고, 그 결과 뜻하지 않게 더 이상 그리스도가 우리의 본보기나 안내자 역할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묻기 전에 예수에 대한 선입견을 먼저 깨뜨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수는 흔히 생각하듯 길들여진 인물이 아니라 야성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종교 기득권층을 위협하는 위험한 인물이었고, 호수를 건널 때 몰아치던 거친 폭풍이나 거라사의 귀신들린 자를 보고도 당황하지 않고 결국 평화를 가져온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혈루병을 앓던 여인, 야이로, 우물가의 여인, 막달라 마리아, 베드로, 도마…. 예수를 만난 이들은 변화되고 힘을 얻고 새롭게 된다. 예수는 그들에게 ‘예배하는 법’을 가르친 게 아니라 ‘사는 법’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저자는 “오늘 우리도 예수를 우리의 구원자로 모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안내자로 모실 필요가 있다”며 “스테인드글라스로 치장한 예수에 만족할 게 아니라, 진짜 예수를 만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요즘 교회가 따스한 도덕적 일화로 치장하는 예수의 이야기마저도 위험하고 전복적이고 신비로운 성격을 지니고 있다”며 “교회가 예수를 되찾는 과정은 맹렬하고 엉뚱한 예수의 삶을 재발견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신봉하는 믿음의 대상이 너무 재미없고 싱겁게 보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흥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예수의 눈으로 보면 교회는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백성이지 어떤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를 중심으로 한 신자들의 유기적 집합으로서 예수의 이름으로 남을 섬기도록 세상에 파송된 공동체다. 저자는 “일단 우리가 그 나사렛 목수에게 사로잡히면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예수가 뒤집으려 한 그 체제의 일원으로 볼 수 없다”고까지 말한다. 예수는 실로 반종교적 인물이었고, 예수를 재발견한다는 것은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를 종교 기관으로 보지 않고 예수의 길과 사역에 참여하는 선지자들로 구성된 역동적 공동체로 보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른바 ‘교회갱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제자도’가 필요하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요즘 유행하는 어떤 프로젝트들은 신학과 설교를 똑바로 정립하면 그로부터 갱신이 따라올 것처럼 주장하고 다른 프로젝트들은 성령 충만한 예배나 대안적 예배, 교회 개척이나 신앙에 대한 포스트모던식 접근을 강조하지만, 무엇보다 교회가 예수를 되찾는 일이 급선무라는 것이다. 컴퓨터가 움직이지 않을 때 시동하려면 본래 상태로 재설정하는 수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 모두가 예수로 ‘재부팅’해 교회의 작동 능력을 되찾아야 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그렇게 우리가 ‘작은 예수’가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와 기독교 선교의 토대가 되는 제자도를 회복해야 한다. 하지만 댈러스 윌러드에 따르면 “오늘날 활동하고 있는 기독교 기관들에 관한 한, 제자도는 분명히 선택사항에 불과하고 교회는 ‘제자 아닌 제자들’로 가득 차 있고”, “지금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굳이 제자가 돼야 할 필요도 없고 제자로 성장한다는 표시가 없어도 그리스도인으로 남을 수 있다”. 본회퍼도 이에 대해 “제자도 없는 기독교는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이고, 살아있는 그리스도가 없는 기독교는 제자도가 없는 기독교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저자는 복음서 어디에서도 예수가 우리에게 존경을 요구한 적은 없었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분은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셨고, 예수가 자신의 공동체를 변혁시켰듯 ‘작은 예수’들이 온 세상에 스며들어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것이 그 분의 ‘명령’이다. 그래서 이들은 감리교인들에게는 존 웨슬리보다 예수를, 구세군들에게는 윌리엄 부스보다 예수의 삶을 따르라고 역설한다. 장로교인들에게도 물론 존 칼빈보다 ‘예수 그리스도’다.

독자들을 돕기 위해 이 책 곳곳에서 소개하는 ‘작은 예수’들은 마틴 루터 킹과 디트리히 본회퍼, 마더 테레사 정도를 빼고는 다소 생소한 인물들이다. 저자는 “작은 예수라는 말에 담긴 뜻은 우리 역시 물 위를 걸을 수 있거나 세상 죄를 위해 죽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며 “몇 개의 떡과 생선으로 수천 명을 먹일 능력은 없더라도 손 대접과 관대함의 가치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 죽을 수는 없어도 이타심과 희생, 고난을 끌어안을 수 있다는 말”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