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30년대 조선교회가 점차 교권화되고 제도화되면서 신앙과 교회의 본질인 영성과 복음의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을 때, 그는 교회의 원로급 지도자들이 ‘듣기 거북할’ 정도의 언사로 교회 현실을 비판하고 질타했습니다……, 어쩌면 만우(晩雨)가 질타했던 1930년대 ‘숨 막히는’ 교회현실이 오늘 우리 현실보다 나았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감리교신학대학교(총장 김홍기)에서 교회사를 가르치고 있는 이덕주 교수가 6일 서울 동자동 서울성남교회(담임 배태덕 목사)에서 열린 제7회 만우 송창근 박사(이하 만우) 기념강연회에서 한 말이다. 서울성남교회는 만우가 세운 교회로 올해 창립 64주년을 맞았다.

1898년 함북 경흥에서 태어난 만우(晩雨)는 일본과 미국 등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귀국 후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목회하다 1936년 부산으로 내려가 성빈학사(聖貧學舍)를 설립, 가난한 학생들을 뒷바라지하는 사회·장학사업을 펼쳤다. 독립운동가이기도 한 그는 1937년 흥사단의 수양동우회 사건 때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광복 후 조선신학교 교장에 취임했으나 한국전쟁 때 납북, 결국 1950년 8월 북한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형식적이고 율법적인 신앙과 신학에 반기를 들고 부산항의 윤락가에 뛰어들어 고아들을 돌보는 등 실천하는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 장공 김재준 목사, 만수 김정준 목사 등이 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 교수는 만우를 “경계선에서 양쪽을 아울렀던 신학자”로 평가했다. 그는 “만우는 진보와 보수를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쪽을 버리는 ‘양자택일’의 개념이 아니라 함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공존과 협력’의 개념으로 보았다”며 “만우는 ‘개혁주의 신앙전통’에 두 발을 딛고 서서 서로 다른 교리와 신앙 전통들을 조화시키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한국교회사에서 만우가 남긴 자취를 다음의 두 가지로 요약했다. 그의 말을 요약한다.

첫째, 만우는 일제시대를 산 신학자로 그는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한 복음의 ‘자유와 해방’을 구현하려 10대 소년의 나이로 고향을 떠나 만주로, 서울로, 그리고 일본과 미국으로 가서 신학 공부를 했다. 그는 독립운동에 직접 참여해 옥고를 치른 적도 있었고 목회현장에서도 ‘민족문제’와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보였다.

교회 안에서의 그는 교리와 신조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구습과 전통에 사로잡혀 신앙과 사고의 자유를 억압하는 형식과 제도에 저항했다. 그래서 교회의 원로급 지도자들이이 ‘듣기 거북할’ 정도의 언사로 교회현실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위한 교회의 본질 회복을 축구했다. 결국 만우는 온몸으로 자유와 해방의 정신을 신학과 목회 현장에서 구현하려 노력했던 ‘자유혼(自由魂)’의 소유자이자 시대의 ‘예언자’였다.

둘째는 만우가 오늘 한국교회 현실, 그리고 다가오는 한국교회 미래를 위해 남겨놓은 신학적 가치라 할 수 있다. 만우의 글에는 ‘생명’ ‘일치’ ‘민족’ 등과 같은 단어들이 많이 나오는데, 여기서 만우 신앙과 신학의 주제를 알 수 있다. 그는 복음과 신앙의 본질로부터 나오는 생명력과 영성을 목회와 신학의 내용으로 삼았다.

또한 만우가 자주 사용한 단어 중에 ‘조화’가 있다. 그는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의 조화, 신학과 설교의 조화, 문학과 신학의 조화, 교회와 사회의 조화, 전통과 개혁의 조화, 보수와 진보의 조화를 추구했다. 그는 양극단의 배타적 입장을 경계하면서 극단으로 치닫는 정통파와 신신학파, 교리주의파와 신비주의파, 사회운동파와 경건주의파의 배타적 속성을 비판했다. 그러면서 양극단의 이념과 신학을 통합하고 조정할 수 있는 ‘중도’와 ‘중용’의 노선을 취했다.

양극화 현상 속에서 진행된 만우의 신학과 목회 지향점은 ‘화해와 일치’였다. 경계선에 서서 서로 등을 돌리고 있는 양쪽을 두 팔로 안아 마주 보고, 대화하도록 유도하는 ‘화해자’의 모습이었다. “내 뼈를 조선신학교 교문에 묻어 교직원과 학생들이 나를 밟고 드나들게 하라”고 유언했던 만우가 분단의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유훈같은 메시지는 ‘화해와 일치’, 즉 “제발 하나가 되시오”일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