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저(loser)를 직역하면 손실자(損失者) 혹은 유실자(流失者)로 쉽게 잃어버린 자이다. 관용어로 실패자(失敗者) 정도로 풀이 될 것이다. 우리말 뜻으로는 대수롭지 않은 이 말이 한국의 한 여대생의 발언으로 상종가의 단어가 되었다.

내용인즉 어느 인기 연예방송에 출연한 문제의 여대생이 "키 작은 남자는 루저(Loser)"라는 대담한 발언이 단초가 되었다. 그리고 그 루저 키의 하한선이 180Cm 라고 하기까지 하여 키 작은 남자들의 원성이 자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80이 되는 한국 남자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나는 루저라고 고백하는 인사들이 줄을 잇고 있다.

루저 발언 전에 결혼 한 나는 행운아가 아닐까 한다. 그러나 한국의 여자들이 루저들을 신랑감으로 제외한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사실 키문제는 루저의 한 단면이며 루저의 조건은 갈수록 양양이다.

어떤 여대생이 말하기를 “나는 시앗을 보아 울더라도 벤츠를 타고 손톱손질하러 미장원에 갈 수 있는 남편을 원한다” 했다는 말을 들은지 이미 오래다. 루저(loser)의 반대는 당연히 위너(winner) 이다.

사실 어떤 측면에서 인간의 역사는 위너들의 기록이다. 따라서 역사의 뒤안길에 이름 없이 사라져버린 루저들을 일일이 기억하지 않는다. 수많은 루저들의 희생 위에 서 있는 위너들만을 기억할 뿐이다. 심지어 독재자였을 지라도 한 시대에 위너로 살았던 자들을 추앙하는 것이 인간 역사의 단면인 것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의 위너상은 점점 말초적인 면이 승하다는데 문제가 있다. 외모지상주의가 판을 치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테면 수많은 성형외과의 들을 부자로 만들어 주고, 배우나 탈렌트들에게 과도한 개런티를 주어 사회적 병폐를 만드는 나라가 한국이다. 그러면 이런 병든 승자 독식주의 사회로 가는데 교회는 어떠했는가? 가 중요하다.

성공지상주의에 올 인 한 것은 다름 아닌 한국의 교회였다는 것에 반기를 들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 루저들을 위해 오신 것을 잊어버리고 위너들을 찾기에 혈안이 되지나 않았는지 반성 할 일이다. 그 결과로 한국 사회의 위너의 다수를 점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정치적 도의적 타락, 경제 문화 모든 면에서의 부패 등을 주도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반성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위너들의 집단이 되어 폼잡는 한국 교회에 루저들을 위한 예수께서 들어가실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