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이나 믿음 등의 단어는 ‘비논리적’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 적어도 사회나 학문의 세계에서는 그렇다. 진실이나 사실의 영역과 관계없이 ‘논리’만으로 세계를 재단하는 학문의 영역에서는 논리만으로 ‘신은 죽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신은 존재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바울은 회심하기 전 얼마나 학문에 깊이 천착했는지 총독의 심문 자리에서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행 26:24)”는 말까지 들었지만,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고 고백한다. 그는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빌 3:8)”이라고까지 고백했다.

자기 논리에 빠져 신을 거부해버리는 니체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깊은 학문의 세계에서 오히려 인간의 한계와 불완전을 철저히 깨닫고 신을 만나는 이어령 박사와 같은 사람도 있다. 또 전도서 기자는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전 12:12)”고도 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10년 넘게 기독교세계관 운동을 하며 활발한 저술 활동도 하고 있는 양승훈 박사가 <그리스도인으로 공부를 한다는 것은(CUP)>을 통해 이 질문에 ‘감히’ 답했다.

그는 한 마디로 “학문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발견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공부를 업으로 삼겠다고 작정한 후 지난 30여년간 한 순간도 이 질문을 떠올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는 그는 “이것은 비단 나만의 고민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 학생들과 학문을 업으로 삼고 있는 학자들의 공통적인 고민이라 생각된다”고 짐작한다.

성경 속 여러 구절에서 학문이나 지적인 것이 부정적으로 그려진 데 대해 그는 “자세히 살펴보면 성경은 지식 그 자체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변론(딛 3:9, 딤후 2:23), 사변놀이에 불과하거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지식(딤전 6:20)을 경계하고 있다”며 “오히려 성경은 곳곳에서 바른 지식이 도구적 가치에 더해 내재적 가치가 있음을 말해준다”고 주장한다.

천지창조를 마치신 후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셨던 문화명령 혹은 창조명령(창 1:28, 2:15)은 명백히 학문 행위를 포함하고 있으며, 다니엘 12장 3절에서도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는 말로 지혜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사야도 50장 4절을 통해 학문 활동이 이웃 사랑의 실천이라고 했다.


책에서 그는 기독교적 지성의 적에 대해 △이성을 절대적 진리의 기초로 삼은 근대주의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는 모더니즘 등으로 정의하고, 실천이 따르는 성경적 ‘앎’이야말로 이를 이겨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삶으로 이어지는 이 성경적 앎을 따르기 위해 그는 △신앙의 개인주의화 △교회 중심의 형식적인 종교생활 △신앙을 형식의 틀로 제한시키는 구원관 등을 주의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또 기독교적 학문 연구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하나의 방법이며 나아가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한 학문 연구를 통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간다는 뜻으로 “공부하는 것도 예배”라 말하면서, 두번째 발견은 기억하지 않고 새로운 것만을 추구하는 학문 정신은 자칫 절대 진리의 이상을 가진 기독교 신앙과 갈등을 야기할 수 있고, 이는 학문의 세속화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과학자’들이 자연을 연구할 수 있는 인간의 모든 능력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먼저 인정하고 이를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서 소명 의식을 가져야 하고, ‘선한 청지기’로서 이러한 능력을 잘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아무쪼록 부족하지만 지적 활동에 소극적 자세를 가졌던 기독 학자들, 학문 추구가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원한 가치, 천국의 가치가 있는지를 고민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학문적 활동에서 제사장적 소명을 발견하는 데 다소나마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한다. 그만큼 그리스도인 학자들 중 이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도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