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 평양 대부흥운동’의 주역 길선주 목사(吉善宙)가 뒤늦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는다.

길 목사는 3·1운동 당시 한국교회를 대표해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1년 7개월간 투옥 생활을 했지만, 당시 무죄를 선고받았다는 이유로 그간 포상이 보류돼 왔다.

정부는 오는 15일 열리는 제64주년 광복절 기념식에 앞서 길 목사의 독립장 수여 사실을 12일 발표했다. 주무부처인 국가보훈처(처장 김양)는 12일 브리핑을 통해 “길 목사는 독립선언서에 장로교를 대표해 서명한 사실이 분명하고, 체포된 뒤 1년 7개월간 옥고를 치른 공적이 행형기록 등으로 확인됐다”며 독립장 추서의 배경을 설명했다.

이번 독립장 추서는 그간 개신교가 일제시대 3·1운동을 비롯한 독립운동을 주도했음에도 국사교과서에서조차 자세히 언급되지 않는 등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결정돼 의미를 더하고 있다. 향후 한기총에서 주도하고 있는 한국개신교 역사바로세우기에까지 이러한 흐름이 이어질지 교계는 주목하고 있다.

1869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나 한의학을 연구하던 길선주 목사는 1897년 마포삼열 선교사를 통해 회심하고 세례를 받은 후 1907년 최초의 신학교인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된다. 1907년 1월 열린 사경회에 많은 성도들 앞에서 회개를 하며 부흥운동에 불을 붙였으며, 당시 그가 인도하는 부흥회에서는 병이 낫고 감시하던 순경마저 회개하는 일이 빈번했다.

그는 장로 시절부터 새벽기도를 주도했으며, 이는 한국교회만의 전통으로 이어졌다. 또 성경 읽기를 강조하며 구약 30독, 신약 1백독, 계시록 1만독을 했고, 2만여 차례의 설교로 총 380만여명에게 복음을 전했다.

길 목사는 민족운동에도 앞장섰다. 3·1운동 이전인 1912년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에 연루돼 수난을 당했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해 옥고를 치른 후에는 전국으로 부흥회를 다니면서 물산장려 운동, 금주 운동 등을 함께했다. 교육에도 관심을 갖고 숭실학교와 숭덕학교를 설립했다. 당시 사회에 뿌리깊은 남녀간 불평등을 타파하기 위해 교회 내 남녀 좌석의 구별을 폐지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