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는 혈압을 체크하고 약을 받기 위해 늘 가는 동네 병원엘 갔습니다. 저는 몇 년 전부터 약을 복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사의 소견에 따라 노바스크 5mg 알약을 복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 년에 두 차례 정도 약을 받으러 병원엘 갑니다. 약을 받으러 병원엘 가면 먼저 혈압을 재는데 늘 긴장이 됩니다. 혹 혈압이 높아져서 의사가 앞으로는 약을 바꾸라거나 복용량을 늘리라고 하면 어쩌나 하는 부담이 있습니다. 물론 병원에 가기 전에 집에서 전자 혈압기로 혈압을 측정해보지만 대체로 집에 있는 기계에 비해 병원에 있는 수동식 혈압계 수치가 10 이상 더 높게 나옵니다. 저의 전자 혈압계가 병원에 있는 수동식 혈압계보다 훨씬 더 정확한 게 분명하지만 의사는 병원에 있는 수동식 혈압계의 결과를 믿으니 도리가 없습니다.

병원에 갈 날이 가까워지면 지나온 6개월을 돌아보게 됩니다. 의사가 지시한 것을 잘 지켰는지... 그 동안 수면이 부족했던 날들, 짠 음식을 절제하지 않고 먹었던 기억들, 바쁘다고 운동하지 않았던 것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그라우스산에는 언제 다녀왔고, 수영장에는 언제 갔던가? 혈압은 몸의 컨디션에 따라 예민하게 변합니다. 수면이 부족하거나 과로하게 되면 평소보다 높게 올라가곤 하기 때문에 늘 신경이 쓰입니다. 의사는 짠 음식을 피하고, 충분한 수면을 취하고, 꾸준히 운동을 하면 약을 먹지 않아도 어느 정도 고혈압 조절이 된다고 하지만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쉽지를 않습니다.

제가 처음 혈압약을 복용하기 시작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주위에서는 한번 약을 복용하기 시작하면 죽을 때까지 약을 먹어야 한다는 등, 고혈압이 있으면 다른 장기도 손상을 입었을 지 모른다는 등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말들만 들려주어서 우울했습니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드는구나... 게다가 혈압 약값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하루에 한 알, 그리고 한 알에 1.5불 정도 하니까 한달이면 45불, 1년이면 500불이 넘습니다. 여행이라도 갈라치면 그렇지 않아도 챙길 게 많은데 혈압약까지 챙겨야 하니 그것도 귀찮습니다. 비타민이나 다른 영양제는 다녀와서 또 먹으면 되지만 혈압약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귀찮고, 돈 들어가고, 일 년에 두 차례씩 병원에 가서 긴장해야 하고... 그게 혈압약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혈압약 먹는 것이 일상사가 되다보니 약을 먹고 사는 것이나 안 먹고 사는 것이나 별 차이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의사 제자가 “교수님, 노바스크는 심장이나 몸에 좋기 때문에 고혈압이 아닌 사람도 먹으면 좋습니다”라는 말이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아부를 하려면 그런 아부를 해야지...’ 그래서 근래에 들어 저는 어차피 혈압약을 먹을 바에야 혈압약을 먹는 것이 먹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유익하다는 궤변을 만들어내기로 했습니다.

첫째, 고혈압은 늘 하나님 앞에 설 때를 상기시켜줍니다. 일 년에 두 차례씩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지난 6개월의 삶을 보고해야 하는 것처럼 늘 하나님 앞에서 이 세상의 삶을 보고해야 할 날이 있음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혈압은 지난 6개월의 삶을 숨기지 않고 보여줍니다. 무리하지 않고, 스트레스 받지 않고, 충분한 수면을 취하고, 부지런히 운동을 하면 병원에 가는 것이 두렵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인생을 바르게 살았다면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혈압약은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할 것을 상기시켜줍니다(롬14:12).

둘째, 고혈압은 어차피 우리 인생은 유한하고 우리의 육체는 늙는다는 걸 깨닫게 합니다. 아무리 산삼 보약을 먹어도 우리 몸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약간 저혈압이라고 자랑하는 저의 아내라고 해서 더 나은 것도 아니지요. 혈압이 낮아도, 당뇨가 없어도, 지방간이 없어도 우리의 육체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낡아지는 우리의 겉 사람을 가꾸는 것보다 속사람을 새롭게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함을 다시 확인합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고후4:16).

셋째, 고혈압은 절제하는 삶을 실천할 수 있게 합니다. 저는 언제부터인가 고혈압으로 인해 할 일이 있으면 밤잠을 자지 않던 청년의 교만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고혈압 진단을 받기 전에도 음식과 생활습관을 절제해야겠다고 여러 차례 결심했지만 작심삼일이었습니다. 아내가 애원을 해도 소귀에 경 읽기였습니다. 하지만 고혈압 진단을 받으니 어금니를 깨물면서 결심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다음 번에 병원 가서 혈압 측정 할 것을 생각하면 저절로 절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 “나는 포니고, 양 교수님은 탱크”라고 했던 권 교수의 얘기도 지나간 추억 속의 아첨으로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고전9:25).

고혈압이 이렇게 유익하니 고혈압약은 비타민보다 훨씬 더 유익한 게 분명합니다. 비타민C 전도사라는 이왕재 교수의 말을 듣고 저는 지난 몇 년 동안 부지런히 비타민C를 먹었지만 솔직히 눈에 띄는 유익은 거의 없었습니다. 비타민 산다고 돈만 날린 셈이지요. 하지만 노바스크 5mg을 몇 년 간 먹고는 저의 삶이 달라졌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생활만 달라진 것이 아니라 천국에 대한 소망도 훨씬 더 생생해졌습니다. 노바스크를 먹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쉽게 분기탱천하던 사람이었지만 이 약을 먹고부터는 좀 더 인생을 관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노바스크를 거의 효과가 없는 비타민C와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면 수많은 약들 중에서 유독 노바스크만 유익할까요? 아닙니다. 저의 짧은 의학 지식으로 미루어볼 때 당뇨약은 노바스크보다 더 유익하고, 항암제는 당뇨약보다 훨씬 더 유익할 게 분명합니다. 비타민C는 물론, 오메가나 달맞이유보다, 아니 로얄젤리 등등... 월마트 약국 앞에 쌓여있는 건강보조식품들은 전혀 인간을 바꾸지 못하지만 혈압약은 사람을 바꿉니다. 바람둥이에게 산삼, 녹용, 보신탕은 바람기만 북돋우지만 당뇨약이나 항암제는 삶의 태도를 바꾸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왕 먹어야 하는 약이라면 이 약이 어떤 보약보다 더 유익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먹기로 했습니다. 혈압약이나 당뇨약 먹는 재미로, 아니 항암제 먹는 재미로 인생을 산다? 웃기는 얘기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캐나다에서는 언론의 자유만이 아니라 마음대로 생각할 자유도 있으니까요... - 090708

/양승훈 교수(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원장, www.view.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