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라이프찌히 논쟁
다음 해 초(1519년 1월) 교황청의 특별한 호의의 징표인 황금 장미를 가진 밀팃츠가 선제후에게 나타났다. 그는 선제후가 루터를 추방하라는 카예탄의 요구를 이미 거부한 것을 모르고 루터를 추방하거나 로마로 압송할 경우 선제후에게 있을 유익을 선전하였다. 그리고 루터를 만날 수 있도록 허용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며 이 요청에 따른 만남은 허락되었다. 회합을 가진 두 사람은 이제 이후로는 피차 공적으로 침묵하기로 약속을 하였다.

그러나 엑크가 침묵을 깨트리고 루터를 공격하자 루터는 동료인 칼슈타트와 함께 라이프찌히로 따라가 그와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1519. 7·4 -14). 잉골슈타트의 교수였던 엑크는 자신의 대학이 아닌 라이프찌히 대학을 교묘하게 비텐베르크 대학의 도전자로 끌어들였다. 이 두 대학은 오랜 경쟁관계에 있던 공작령의 작센과 선제후령의 작센을 대표하는 대학들이었던 것이다.

이 논쟁에서 루터는 구원받기 위해 교황을 인정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반박하였다. 게다가 콘스탄스회의(1414 - 18)가 후스를 잘못 정죄한 것을 들어 교회의 공의회조차도 과오를 범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교황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이 지상에서도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고 주장하였다. 엑크가 주장하는 “로마에의 순종”(Romana obedienia)보다 자신의 입장이 더 기독교적이고 참된 의미에서 카톨릭(보편적)이라고 확신했다.

이제 루터가 교황뿐만 아니라 공의회의 권위마저 부인하는 것으로 만천하에 드러나 교황과의 결렬은 공개적인 것이 되었다. 그래서 이 논쟁을 계기로 해서 루터는 작센의 게오르그 공작과 같은 이의 적수가 되었으나, 한편 그의 단호한 태도는 멜랑히톤 같은 이를 우군으로 얻었다.


7. 루터 파문 당하다
라이프찌히 논쟁은 루터에 대한 기대도 증대시켰고 그에 대한 공격도 가속화 시켰다. 엑크는 라이프찌히 논쟁에 대한 보고서를 통해 루터의 출교에 대한 교황의 교서를 이끌어냈다. 1520년 6월 24일 발표된 교서(Exurge Domine, 주여! 일어나소서!)에서 교황 레오는 뉘우칠 수 있는 60일간의 말미를 주면서 이 기간 안에 루터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그와 동료들을 모두 파문할 것이라 하였다.

교서는 루터의 작품 중에서 41개 발언들을 열거하면서 ‘이단적이고 위법적이며 거짓’이라고 정죄하면서 루터의 모든 저서를 불태울 것을 명령하였다.

루터는 자신의 책들이 루벵에서 불탄 사건 이후 그리고 파문 위협을 담은 교서가 아직 비텐베르크에 도착하기 전, 성(城)의 엘스터 문앞에서 학생들과 함께 교황의 교서 뿐만 아니라 로마 교회 법전의 화형식을 12월 10일 거행했다. 이로써 루터와 로마 사이의 모든 다리도 불에 타 버렸다.

8. 세 번 출교 당함
루터를 최종적으로 파면하는 교황의 교서 (Decet Romanum Pontificem, ‘로마 교황은 이렇게 말한다’)는 1521년 1월 3일 로마에서 공포되었다. 자신에 대한 파문은 루터의 영혼 깊숙히 상처를 내었다. 사실 루터는 면죄부 논쟁이 한창 진행 중일 때에도 교황에 전적인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그는 면죄부의 오용들로부터 로마 교황을 보호하는 일이 바로 그 권위를 세워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교황청이 로마를 적그리스도에게 넘겨주었다는 확신이 서게 되자 그 때 루터는 비로소 교황청에 반격을 결심한 것이었다. 따라서 루터가 과거와의 관계를 끊은 것은 급작스레 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이 관계에서 돌아선 것은 자기가 아니라고 하였다. 오히려 자기는 철저히 외면을 당하였으며 세 번이나 출교를 당하였다고 하였다.

“1518년 슈타우피츠는 수도원에 대한 순종의 서약으로부터 나를 풀어주면서 아우그스부르크에 혼자 내버려두었다. 그리고나서 교황이 자신의 교회로부터 나를 끊어버렸고, 마지막으로 황제가 그의 제국으로부터 끊어버렸다. 그러나 주님은 나를 영접하셨다.” 마지막 말은 시편 27:10에 대한 암시이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9. 루터의 종교개혁 3 작품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고함”은 8월에 썼고 외부적인 개혁을 다룬다.
루터는 세속정부가 교회와 사회를 개혁하는 데 주도권을 취하도록 권유하였다. 영적계급이 세속계급보다 우월하다는 중세적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책은 모든 세례 받은 자들은 제사장이라는 명제를 내세웠다. 한편 세례 받은 이들은 모두 제사장들(sacerdotes)이지만, 단지 목사들만이 교역자들(ministeri)이다.

루터는 교황주의가 세 개의 ‘벽들’을 세워 개혁을 막으려 했다고 주장했다.

1. 영적 권위자들이 세속 권위자들보다 우월하다는 것
2. 교황만이 성경의 최종적 해석자라는 것
3. 교황이 교회 회의들보다 우월하다는 것

“만인 제사장설”은 이 벽들을 모두 허물어 버렸다.

“교회의 바벨론 포로”는 10월에 저작됐는데, 신학 자체의 중요한 개혁,
특히 성례전 교리 및 집행과 관련된 개혁을 다룬다. 그는 로마 교황청이
그 권력의 근거로서 ‘일곱 성사’를 창안하고 이용해 왔다고 비난하였다.
그는 특히 카톨릭의 성만찬론 비판에서 세 가지 ‘포로 상태’를 말한다.

1. 평신도에게 포도주를 금하는 것
2. 화체설
3. 미사가 희생제물이라는 것

한편 루터는 성사의 수를 일곱에서 세례와 성만찬,두 개의 성례전으로 줄였다.

“크리스천의 자유에 관하여”는 11월에 쓰여졌다.두 개의 극단적인 명제를 다룬다.

1. 크리스천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누구에게도 종속되어 있지 않다
2. 크리스천은 전적으로 충실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종속되어 있다.

이 이중적 명제는 지금까지 바울의 자유 이해를 표현한 가장 성공적이고
적합한 말이다. 이 논문이 ‘크리스천의 삶 전체를 간략한 형태로 포함하고 있다’고 규정짓는 루터는, 복음이 주는 절대적인 자유와 이웃을 향한 절대적인 섬김의 모습 사이에는 전혀 갈등이 없다고 설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