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는 정식 절차를 거쳐 입국하거나 제 3국을 거쳐 입국한 탈북자의 수가 2백여 명에 이른다. 이들은 뉴욕이나 엘에이, 워싱턴 DC 등 미주 각지역에 퍼져 생활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정식으로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취득하지 않고 생활하는 이른바 불법 체류자다. 이 중 일부는 탈북 당시 언론에 노출돼 국제 사회로부터 주목 받기도 하지만 또 다른 탈북자가 관심사로 떠오르면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이렇게 ‘반짝 주목’을 받았던 탈북자 중 미국에 있는 이들은 어떤 생활을 할까? 미국 내 탈북자는 북한 군부와 관련됐다는 이유로, 혹은 정식 난민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주권 발급이 늦어지거나 사생활을 침해당하는 등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 중 한 사람이 탈북자 이복구 씨다.

이복구 씨는 미사일 부품을 운반하는 북한 만경호 비밀을 폭로해 국제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장본인이다. 북한 미사일에 대한 해박한 정보를 가진 그는 미국 상원 의회에서 두 차례 증언한 바 있다. 당시 그는 신분 노출방지를 위해 두건을 쓰고 증언했다.

북한 김책공업대학 출신인 이 씨는 미사일을 만드는 군수공장 기술발전과장으로 근무했다. 대남방송에서 10여 년간 근무한 경력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는 1997년 7월 21일 북한에 두 아들을 두고 팔도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북했다. 이 씨는 한 달여 동안 북한군과 중국 공안을 피해 도망다녔다. 계속 되는 도피 생활 중 정규동 목사를 만나 한국행 배를 탔다. 그는 한국에서 새로운 삶은 물론 신앙생활도 시작했다.

미국으로 건너와 증언한 이후 그는 망명 신청을 했다. 경비원, 잡일 등 험한 일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탈북자 중 세번째로 미국에 망명을 신청한 그는 요즘 미 정부에 대해 불만이 가득하다. 북한 내에서도 고위급 인사만이 알고 있는 미사일에 대한 사실을 증언했음에도 불구하고 2003년에 신청한 영주권이 발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주권 발급이 늦어져 타국으로 출국하지 못하는 그는 한국에 있는 아들 조차 만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04년 175명 탈북자가 태국으로 입국해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일을 기억할 것이다. 이 씨의 아들은 이 중 한 명으로 현재 건설현장 산업기사로 일하고 있다. 이복구 씨는 “이제 영주권 발급이 늦어지는 것은 개의치 않는다. 하루 빨리 한국에 있는 아들을 만나고 싶을 뿐이다”라고 심정을 토로했다.

그는 자신의 이런 사정을 한인사회에 알리고 도움을 구하기 위해 11일 오후 로텍스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씨는“아들을 미국으로 데려오기는 힘드나 잠시나마 같이 있고 싶다. 한인사회의 도움을 요청한다”고 말했다.

현재 이복구 씨의 아들을 미국에 살게 할 방법은 없다. 이 씨 본인도 “40세인 아들을 미국으로 데려와 뒤늦게 영어 공부를 시키고 싶지는 않다. 또한 오더라도 형편상 함께 지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도 잠시나마 아들을 보고 싶은 마음에 그는 도움을 요청하고 나선 것이다.

이 씨의 아들을 잠시 입국 시킬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교회에서 간증이나 집회를 위해 탈북자를 초청하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현재 학생 신분인 아들을 문화 행사나 학생 교류 프로그램 등에 참가시켜 미국을 방문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문화 단체가 직접 나서야 한다.

이 씨와 함께 기자회견에 참석한 미주북한선교회 박시몬 목사는 “교민이 탈북자의 사정을 잘 알아주기 원한다”며 “자식을 보고 싶어하는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를 마련했다”고 전했다. 그는 ‘한인사회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