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설교자는 소명을 너무 쉽게 이야기한다. 신학교를 찾아 온 지망생에게 소명에 대한 질문을 던질 때 모두가 자신이 소명을 받았다고 대답한다. 유의할 것은 소명이란 일시적인 감정에 의한 욕망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과 소망은 별개의 주제다. 진정한 설교자는 한 인간 욕구보다는 하나님 부르심에 의해 세워진다. 이 소명이 분명한 사람마다 그들의 행보는 빨랐고 흔들림이 없었다.

한국 초기 선교사는 한국교회 설교자를 배출하면서 소명에 대해 각별한 교육을 시킨 바 있다. 그 대표적인 기록은 한국교회 목사가 기초적으로 알아야 할 제반 사항을 열거했던 목사지법(牧師之法, 1920) 가운데 “상제의 명심”서 소명에 대한 철저한 다짐을 펼치고 있다.

첫째, 목사가 되기 위해 하나님 소명을 받았든지, 받았으면 어떻게 그 소명을 입증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둘째, 소명은 하나님 명령으로 어떤 시험이나 위험이나 곤란에 직면해도 소명을 따르는 일념만이 있을 뿐이다.

셋째, 소명은 하나님 전권이기에 인간이 논할 성질 것이 아니며 참된 소명은 단순히 인간에 의한 감동 단계를 넘어, 성령님의 직접적인 역사 아래서 이루어진다.

넷째, 소명을 받은 자는 하나님 공사(公使), 청지기, 종이라 칭하게 되고 자신을 택해 세운 하나님 뜻을 따라 그 말씀만을 전해야 한다.

설교자가 되기 전에 설교자로서 나서려는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다짐할 필요가 있다. 불확실한 소명 의식은 언제나 위태롭기 때문이다. 확고한 소명 의식이 없는 설교자는 확고한 사명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전할 수 없다. 특별히 현대라는 시대에 설교 사역을 감당하게 되는 설교자는 그 자신이 어떤 존재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우선적으로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미 연합장로교 예배 모범>에 있는 대로 설교자란 자신 생활과 목회에서 구별된 삶의 요소를 가지고 활동해야 한다. 주님은 구별된 은사를 말씀의 종에게 주셨기 때문에 그 기능뿐만 아니라, 소유자 전인격이 다른 사람과 구별되며 그들 생활과 생각과는 다른 차원에서 자신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여기서 설교자가 부름받은 인간으로서 자신을 다짐하는 것은 설교자의 중요한 요소다. 즉 자신이 하나님 말씀을 외치기 위해 이 땅에 보냄을 받았고, 이 길만이 평생동안 설교자가 걸어야 할 외길임을 믿는 사람이어야 한다. 구약 선지자는 바로 이러한 투철한 소명 의식 때문에 하나님 메시지를 바르게 외칠 수 있었으며, 하나님 사람으로서 그 생에 전체를 바칠 수 있었다.

설교자는 부름받은 자로서 의무와 책임을 크게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하나 더 제기돼야 할 문제는 설교자가 그 부름을 ‘어떻게 받게 되었느냐’는 질문이다. 그 시기에 관해 레슬리 타자드(Leslis Tizard) 말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소명이란 어떤 극적인 순간에 올 수 있고 오랜 시간을 거쳐서 점진적으로 올 수도 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 소명이 언제, 어떻게 왔다고 정확한 시간과 장소를 밝힐 수 있는 설교자는 많지 않다. 그러나 설교자가 되는 것만이 나아가야 할 자신의 길임을 점진적으로 확신하게 되며 다른 길은 없다고 느끼게 될 수 있다. 마틴 루터도 수년후에 인간이 늙고 눈이 어두운 말을 끌고 간 것처럼 하나님이 자신을 이끌어 가셨음을 깨달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