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를 통해서 배우라
여호수아 2장 1절-14절

달라스 큰나무교회 김귀보목사
(Photo : ) 김귀보 목사

역사학자인 E.H Carr는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History is an 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ast and the present.)라는 말을 했다. 과거의 역사는 현재의 상황 속에서 똑같이 되풀이 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배우는 사람이다. 자기 실수를 통해서 배우는 보통 사람이고, 타인의 실수를 보고 배우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두 명의 정탐군을 여리고로 보냈다. 1절을 보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여호수아가 정탐군을 보내는 모습은 40년 전에 가데스바네아에서 모세가 12명의 정탐군을 보내는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40년 전에는 각지파에서 한명씩 대표를 뽑아서 12명을 정탐하러 보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자기가 뽑은 두 사람만 보냈다. 여호수아가 왜 이렇게 했는가? 여호수아는 과거의 12정탐군의 실패를 통해서 배운 것이 있기 때문이다. 여호수아는 40년 전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자기가 뽑은 두 사람만 정탐군으로 보냈다.

40년 전에 12명의 정탐군을 보낸 것은 겉으로 볼 때에는 굉장히 지혜로운 선택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내면을 들여다 보면 두려움과 불순종으로 시작된 일이었다. 그 결과는 실패였다. 신명기에 보면 그때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21.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차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 한즉. 22. 너희가 다 내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우리가 사람을 우리보다 먼저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알리게 하자 하기에.”(신1:21-22)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올라가서 가나안 땅을 점령하라고 했다. 그런데 전쟁이 두려웠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찾아와서 정탐군을 먼저 보내서 확인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를 했다. 그러면서 이유를 그럴듯하게 가져다 붙였다. 효과적으로 정복하기 위해서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하는지,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미리 계획을 세우자는 것이었다. 모세도 그 말을 좋게 여겨서 허락을 했다. 그런데 정탐군들이 돌아와서는 말을 바꾸어서 정복하러 가지 못하겠다고 모세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 일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40년 동안 방황하면서 광야에서 다 죽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한 두 사람이 보고 판단하는 것보다, 다양한 지식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보는 것이 더 잘 볼 수 있고, 유익하다고 생각을 한다. 이론적으로 맞는 이야기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실을 객관적으로 보지 않는다.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본다. 특히, 자신의 욕심, 두려움, 의심, 탐심, 이기심을 가지고 상황을 보고 판단한다. 그리고 자기 눈으로 보고 나면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으려고 한다. 자기 목소리를 낸다. 더욱이 그 사람이 영향력이 있거나, 전문가면 문제가 더 커진다.

12명의 정탐군이 본 것이 무엇인가? 적들은 크고 두렵고, 자기들은 메뚜기 같다는 것이다. 정복할 수 있는 이유를 본 것이 아니라 정복할 수 없는 이유를 본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과 믿음으로 본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두려움을 가지고 적들을 본 것이다. 자기 눈으로 보고 나니까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자기 생각을 안 바꾸었다. 그리고 그들이 각 지파의 대표라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지파의 대표였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이다.

정탐군은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의 렌즈로 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영적 지도자가 가진 비전과 믿음과 생각을 대신 해서 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여호수아는 누구를 정탐군으로 보냈겠는가? 자기와 같은 믿음과 생각과 시각을 가진 사람 두 사람을 뽑아서 보냈다. 여호수아의 눈과 귀가 되어서 대신 정탐을 하고 오라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는 필요가 없는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전문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전문가들이 많아야 한다. 자기 주장을 하는 전문가가 필요하지 않다. 자기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일하는 전문가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 지혜와 능력을 사용하는 전문가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장애물을 제거하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어가기 위해서 전문지식을 사용하는 전문가가 필요하다. 하나님은 성막을 지을 때 모세에게 지을 그림은 보여주셨지만 모세에게는 지을 지식과 기술이 없었다. 그래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하나님의 영을 충만케 해서 전문적인 일을 하게 했다.(출31:1-11) 전문가들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묵상해야 한다.

우리는 실수를 통해서 배운 또 한 명의 사람을 발견한다. 바로 기생라합이다. 이 이야기에는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첫 번째는 왜 정탐군들이 기생집으로 갔을까? 두 번째는 라합은 왜 적국의 정탐군들을 숨겨주었을까? 세 번째는 히브리서 11장에는 왜 기생 라합을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첫번째, 정탐군들은 왜 기생집으로 갔을까? 당시 여리고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관문도시 였다. 외국과의 무역이 굉장히 활발했기 때문에 상인들이 출입이 잦았다. 여리고성을 점령하고 난 뒤에 아간이 훔친 물건 중에 “시날산 외투”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서 바벨론의 상인들까지 여리고를 드나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수7:21) 여리고에는 이런 상인들이 묵을 여관이 많이 있었다. 여관은 모든 정보의 나눔터다. 누구 집에 아기는 태어났다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부터 정치적으로 아주 중요한 정보 그리고 국제적인 정보까지 다 알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그리고 이곳은 외국사람들이 많이 드나들기 때문에 여리고를 정탐하러 갔던 사람들이 자기 몸을 숨기기에는 이곳 보다 안전한 곳이 없었다. 라합의 집은 단순한 기생집이 아니라 상인들이 묵어가는 여관이었을 것이다. 역사가 요세푸스도 라합을 여관주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오늘 말씀에 따르면 이 당시 여리고의 정보망이 굉장히 발달했던 것 같다. 정탐군이 들어오자 말자 스파이가 들어왔다는 정보가 왕에게까지 보고가 되었다. 3절에 보면 라합의 집에 정탐군이 들어온 것을 확인하고 잡으러 왔다. 이제 정탐군들은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 였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나서 라합이 정탐군을 살려주었다. 라합은 자기 나라를 염탐하러 온 정탐군을 왜 살려주었을까? 그 대답을 얻기 위해서는 라합의 말과 행동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라합의 말을 들어보면,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를 쳐들어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9절-10절을 보자. “9.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탈출한 이야기, 요단강 동쪽 편에서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의 나라를 무너뜨린 이야기를 다 듣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곧 여리고 성을 쳐들어 올 것이라는 것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라합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쳐들어오면 여리고성이 함락될 것이 뻔한데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보면 라합이 정탐군을 기다렸다고 볼 수 도 있다. 왜냐하면 라합의 행동은 즉흥적인 행동이라기 보다 치밀하게 계획된 행동에 가깝다. 라합은 두 사람이 왔을 때 정탐군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군사들이 잡으러 오기 전에 이미 정탐군들을 숨겨놓았다. 그리고 정탐군들에게 도망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줄 뿐만 아니라 안전하게 도망갈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까지 말해 주었다. 그리고는 그 댓가로 나중에 자기 목숨을 살려달라고 협상을 했다.

여기까지 보면 라합은 자기가 가진 정보력을 이용해서 죽음에서 자기 가족들의 목숨을 건진 지혜로운 여인이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이런 라합을 믿음의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들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히11:31)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으로 산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된 명예의 전당 같은 곳이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모세 이런 쟁쟁한 사람들의 이름만 기록되는 곳이다. 그런데 이런 곳에 라합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기생이 자기가 살려고 정탐군 한번 숨겨준 일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어서 믿음의 명예의 전당에까지 이름을 올려주는가?

성경에 보면 라합을 기생이라고 한다. 그런데 라합은 오늘날처럼 길거리의 몸을 파는 창녀가 아니었다. 우리 성경에 기생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로 <조나>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그 당시 신전에 소속되어 있었던 여자 사제를 부를 때 쓰였던 단어이다.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제사 의식에는 남자와 여자의 성행위가 포함되어 있었다. 다산, 비, 풍요, 생산의 풍부함은 남성신과 여선신의 왕성한 성적결합에서 온다고 믿었다. 사람들이 모여서 신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성행위를 해야 그것을 보고 바알신이 즐거워서 비를 내려준다고 믿었다. 모압의 여인들이 바알의 섬기는 축제에 이스라엘 남자들을 초대해서 음행을 했던 것이 이런 의식이었다.(민25장) 그것을 담당했던 사람이 신전 기생들이었다.

이방 신전의 사제였던 라합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를 들어 보자. 11절을 보자.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이게 무슨 말인가? 내가 바알 신을 섬겨왔는데 이제 보니까 바알이 참 신이 아니라 너희들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말이다. 무슨 근거로 라합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10절을 보자.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이집트를 탈출하게 하고, 홍해를 건너게 하고, 광야 40년을 이끌어 온 것을 보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참신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제까지 섬겨온 가짜 신을 버리고 참신이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신으로 섬기겠다는 말이다.

라합은 자기가 평생 섬겨온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다. 자기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 올인(all in)한 것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고향 땅과 섬기던 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하고 가나안으로 가는 것과 비교할 수 있다. 나오미를 따라 이스라엘로 왔던 룻과 비교할 수 있다. 라합은 단지 정탐군을 숨겨주었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이 아니다. 우상을 버리고 자신의 모든 인생을 하나님께 걸었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이다.

라합이 보아스의 어머니가 되어서 메시아의 족보에 들어온 것이 우연이 아니었다.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마1:5-6)

여호수아와 라합은 공통점이 전혀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 공통점이 있다. 실수를 통해서 배웠다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실수를 통해서 배워서 제대로된 정탐군을 보내고 여리고를 점령할 수 있었다. 라합은 실수를 통해서 배워서 자기와 자기 가족의 목숨을 구원할 수 있었다.

실수를 통해서 배운 사람이 해야할 일이 있다.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는 것이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잠26:11) 제일 미련하고 불행한 사람이 실수를 통해서 배우지 못하고 실수를 반복하는 사람이다.

실수를 통해서 배운 사람은 새로 시작한다. 탕자는 실수를 통해서 배워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다. 베드로는 실수를 통해서 배워서 자기 사명의 길로 걷기 시작했다. 예수님과 함께 달린 우편의 강도는 실수를 통해서 배웠기 때문에 예수님께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은혜를 구했다.

하나님은 과거를 회개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고 받아 주셨다. 받아주실 뿐만 아니라 새롭게 살 능력을 주셨다. 이것이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용서의 은혜를 주신다. 우리를 짖누르고 있는 사탄과 죄의 권세를 벗어 던지게 하신다. 성령님을 통해서 새로운 삶을 살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실수를 통해서 배운 것이 있다면 새로 시작하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라.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라. 하나님이 능히 여러분을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