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욱 교수
신성욱 교수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한 달에 두 번 뜨는 보름달에 관심이 많았다. 그분들에게 보름달은 '풍요'를 의미했다. 그래서 새벽에 목욕한 후 물을 떠놓고 달에다 소원을 비는 일을 즐겨 했음을 본다. 

그것은 달에 영험한 기운이 들어있어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샤머니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창조해주신 피조물을 신으로 숭배하고 섬기는 어리석은 시대가 오래 이어져 왔다. 

물론 캄캄한 밤에 온 세상을 비추는 둥근 달을 보고 기분 나빠할 사람은 없다. 달을 보면서 연인을 그리워하거나 시를 쓰는 이들이 적지 않음을 본다. 

나 또한 둥근 달을 볼 때마다 마음이 푸근해지고 기분이 좋아짐을 경험한다. 며칠 전 밤 하늘에 슈퍼 블루문이 떴다고 세상이 난리가 났다. 14년 이후에나 볼 수 있는 아주 큰 달을 기념하기 위해서 서로가 사진을 찍어서 지인들에게 보내거나 SNS에 올리는 경쟁을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슈퍼 블루문을 쳐다보고 사진을 찍으면서도 "블루문인데 왜 블루색이 아니지?" 이런 질문을 제기하지 않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이 질문이 터져 나와야 정상이다. 아이들 중에서는 이런 질문을 하는 경우가 많음을 본다. 아이들 때는 호기심이 많기 때문이다. 한 페친이 올린 글에서 어린 아들이 바로 그 질문을 아빠한테 했다고 한다. 블루문인데 왜 블루색이 아니냐고 말이다. 역시 아이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주입식 교육을 받다 보니 고정관념이 쌓인 관계로 호기심이 줄어든다. 궁금증이 유발되지 않으니 질문도 생기지 않는 것이다. 

나는 슈퍼 블루문을 보면서 좀 전에 소개한 아이와 똑같은 의문을 가져보았다. '블루문 색깔이 푸르지도 않는데 어떻게 해서 '블루문'('Blue' moon)이란 이름이 붙었을까?' 인터넷을 찾아보았다. 서양에서는 우리와는 달리, 한 달에 두 번이나 뜨는 보름달을 불길한 것으로 여겨 '배신자의 달'로 부른 것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블루'와 비슷한 옛 단어 'belewe'에 '배신하다'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블루문'은 '블루'라는 '색'이랑은 전혀 상관이 없이 만들어진 단어라는 것이다. 모양새가 자꾸 바뀌니 '배신하다'는 뜻이 붙여진 것 아닌가 생각한다. 똑같은 사물을 보고 서양인과 동양인의 생각이 이처럼 대조적이다. 우리나라는 "새가 '운다'"라고 하는데, 미국에서는 "새가 '노래한다'"(Birds are singing)고 한다. 하늘이나 숲에서 소리 내는 똑같은 새를 보고 서양인과 동양인이 느끼는 감정이 이렇게 다르다. 

어떤 것에 대한 사람마다의 생각에 이런 차이를 보기도 하지만, 같은 것에 대한 한 개인의 감정 또한 때에 따라 차이가 있음을 본다. 

최근 아침에 아파트 내에 맨발 걷기를 위해 마련되어 있는 마사토 땅을 1시간 걸었다. 노인 몇 분과 함께 걷고 있는데, 마침 한 부부가 맨발로 걷고 있는 우리를 바라보면서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며 귓속말로 이야기하면서 지나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저 사람들은 신발이 없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저 굵은 모래밭에서 맨발로 저러고 있나?'라는 눈초리가 엿보였다. 나 또한 몇 주 전만 해도 그런 시선으로 맨발로 걷는 이들을 바라본 적이 있다. '맨발로 걷는 사람이 신발 신고 걷는 사람보다 건강에 더 좋다는 확실한 과학적 근거가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지배했다. 그래서 맨발로 걸어가는 이들을 보면 뭔가 무식해 보이고 측은해 보였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어느날, 신발을 신은 채 맨발로 걸으면서 나를 포함한 '맨발의 청춘'(?)들을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이들이 너무도 불쌍하게 여겨졌다. '저렇게 신발 신고 걷는 것보다 나처럼 신발을 벗고 걸어야 건강에 훨씬 좋은 건데, 그걸 모르니 몇 주 전 나의 모습처럼 당당하게 걸어가는 거지!' 이런 생각이 미치자 신발 신고 걷는 이들에게 이 기쁨의 좋은 소식인 '맨발 걷기'의 복음을 전하고픈 마음이 간절해졌다. 

물론 이젠 만나는 지인들에게 소중한 복음을 전해주고 있다. 카톡으로 맨발 걷기에 관한 좋은 영상도 보내주곤 한다. 복음은 혼자 간직하고 있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건강에 유익한 정보는 널리 퍼뜨려야 한다. 사람들에게 널리 유익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복음은 영원한 생명에 관한 소식이다. 불신자들은 일주일에 몇 안 되는 주일을 공휴일로 쉬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교회에 나가야 하는 우리 성도들이 불쌍하게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믿는 사람들이 불신자들을 바라볼 때는 불신자들이 우리를 측은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 이상으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최근 예수님을 처음 믿은 유명한 탈렌트 한 사람을 알고 있다. 우연한 기회에 하나님이 알게 해주셨는데, 조만간 다시 만나서 식사하기로 했다. 노래를 잘하고 춤도 잘 추기에 공연을 꽤 자주 나갔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나서부턴 교회에 가서 찬양으로 특송을 하면서 주일성수를 열심히 하고 있다. 한 번 공연 가면 꽤 짭짤한 수입이 들어옴에도, 주일에 하나님께 찬송으로 영광 돌리는 걸 즐겨한다. 예배 시엔 다 헌금을 하기에 손해보는 경우가 그에게는 더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을 위해 쓰임 받는 재미에 폭 빠져있는 그분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걸 생각하게 된다. 

예수님에게 푹 빠져있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변화이다. 이게 바로 '복음의 위력'이고 '복음 전도의 목적'이다.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선한 영향을 미쳤던 이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을 잘 알고 있다. 나 또한 엄청나게 존경하고 있는 분이다. 그렇다. 복된 소식은 전해야 한다. 

'맨발 걷기'가 모든 질병 치유에 도움이 되는 만병통치약임을 알고 내게도 유익을 주기에 사람들에게 계속 전하고 있다. 영혼 구원은 육신의 건강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소중하다. 때문에 복음 전도에 더 박차를 가해야 하리란 마음을 이전보다 더 굳게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