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5-26)".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생을 주시는 참 생명이시기에, 믿는 자는 비록 육체적인 죽음을 겪는다 할지라도, 살아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씀은 육체적인 죽음을 맞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 곧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영원히 끊어지는 죽음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활(復活)'의 사전적 의미는 쇠퇴한 것이나 없어진 것이 다시 성하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뒤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일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곧 '다시 산다'는 뜻입니다. 다시 살아야 하는 이유는, 죽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절은 우리 교계에서 성탄절과 함께 양대 절기입니다. 주후 니케아 공의회에서 현재와 같이 춘분 후 만월(보름달) 다음 오는 첫 번째 주일로 정하여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탄생과 공생애, 그리고 죽으심과 부활의 승리를 통해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사명을 다 이루시며, 승천을 통해 이 땅에서 이루실 구원 역사를 마무리하셨습니다. 승천하실 때, 후에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 기록을 보자면, 예수님의 부활을 맨 처음 본 사람은 오늘 제목처럼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입니다.

특히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증인으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그를 통해 부활의 증인이 되는 영광과 부활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성경에서는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를 따르는 다른 여인과 함께 갈릴리를 시작으로 예루살렘에까지 올라왔고,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골고다 언덕까지 따라와 예수님께서 고통당하시는 모습을 줄곧 지켜보면서, 내내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쥐어짜는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애를 태웠던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정치범으로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을 당하셨는데, 당시는 처형장 근처에 얼씬거리는 것만으로도 정치범에 동조한다는 뜻으로 체포되는 시대였습니다.

그럼에도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은 예수님과의 가장 근접한 위치에서 예수님의 처형 장면을 끝까지 지켜봤는데, 이는 목숨을 건 아주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모습을 그린 성화(렘브란트).

이렇게 예수님께서 고난받는 자리에 함께한 사람들은 부활의 목격자가 될 수 있었고 증인이 될 수 있음을 성경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던 베드로는 어땠습니까.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때부터 줄곧 어슬렁거리며 눈치를 보다, 사람들의 추궁을 견디지 못하고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며 배신했습니다. 결국 그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고향으로 돌아가 본업을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나머지 열한 제자 역시 모두 베드로처럼 주님 곁을 떠나갔지만, 끝까지 주님 곁을 떠나지 않았던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한 여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쓰라린 가슴으로 지켜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들은 결국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을 맛보게 됐고, 부활의 증인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당당하게 큰 소리로 약속한 제자들보다, 아무 말 없이 주님을 믿고 따랐던 막달라 마리아와 그 여인들은 쉽게 주님을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찌 보면 남자들의 체면이 말이 아니기도 합니다. 여인들의 깊은 믿음이 오히려 주님의 부활에 있어 더 큰 영광의 호산나가 아니었을까요!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은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선물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의 고통 속에 죽으심으로써 우리 같은 죄인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또 죽으시고, 무덤에 까지 내려가시어 저 같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울 사도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철저히 자신을 내려놓고 죽는 것을 말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임을 믿기에, 바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확신하면서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바울 사도의 말처럼 "날마다 죽노라" 고백할 수 있는 지도자들과 신앙인들을 찾기가 매우 힘듭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한 여인들처럼,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주님 곁을 지키는 믿음이 필요한 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며 이를 알렸던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했던 여인들은 곁에서 주님을 지켜낸 인물들이며, 주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했던 영광의 증인이 되어 지금까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해마다 겪는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은 주님의 뜻과 달리, 저만치 먼 곳에서 하나의 행사처럼 치러지고 있어 안쓰럽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신앙인들 같은 내음만 풍기다, 막상 교회 밖에 나오면 종교인으로 변해버리는 모습들을 보면서, 양과 염소를 가리는 그 날이 점차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지 못하는 어리석은 쭉정이처럼 느껴집니다.

마침 봄비가 내려 대지를 촉촉히 적시고, 한층 포근한 느낌이 들며 날씨도 풀려 나뭇가지에는 움이 트고, 철쭉나무에는 꽃망울이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어느새 봄이 왔구나,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봄은 익어가고 나무들은 그런 기운들을 먼저 알아차리며, 빗방울이 적셔주고 햇살이 따스하게 비치면, 죽은 것 같았던 나무들이 금 새 움을 틔우고 꽃망울이 맺힙니다. 이것을 보노라면, 주님의 놀라운 창조에 무한한 사랑과 감사와 찬송이 세상에 울러 퍼지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과 의지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자연의 변화 안에서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자리를 옮긴 부활을 보며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참한 죽음을 목격하고 모든 것이 죽어버린 듯한 날을 보내던 제자들이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만난 것이 바로 부활 체험이었습니다. 그 체험을 맛볼 수 있도록 연결해 주었던 사람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와 그와 함께했던 여인들입니다.

특히 제자들은 자신들이 이제껏 살아왔던 삶의 의미와 가치가 송두리째 달라짐을 깨달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더 이상 죽음과 죄가 삶의 굴레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넘어서는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어두운 다락방에서 두려움에 떨고 움츠리던 삶에서 벗어나, 이제 당당하게 뛰쳐나와 주님의 부활을 선포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은 것입니다. 부활의 삶이 큰 소망으로 이루어진 제자들의 삶 속에서, 부활의 승리가 곧 복음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확신하며 세상으로 뛰쳐나와 외쳤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헤롯의 잘못을 지적하여 순교를 당했던 이 시대의 세례 요한은 어디로 갔을까요.

다윗 왕에게 목숨을 담보로 충고했던 이 시대의 나단 선지자는 어디에 있을까요. 나라의 잘못에 항거했던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어디로 숨었을까요.

도대체 양들을 이끄는 목자들은 왜 침묵하고 있나요? 지금 동성애, 낙태, 살인, 방화를 비롯하여 참 교육과 역사가 왜곡되고, 거짓과 위선, 정직이 결여된 지금의 꼴을 보고도, 어찌하여 침묵만 하고 있나요.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고 있는 것인가요?

예수님 당시 비록 이 세상에서 가장 고달프고 천한 사람으로 낙인찍혀 소망 없는 삶을 살았던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한 여인들은, 예수님을 만난 후 새로운 희망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천국을 향한 영광의 부활을 목격하였습니다.

이 시대 부활의 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참혹한 비극을 초래하는 신앙인들에게 막달라 마리아와 그와 함께 한 여인들은 외칩니다. 부활이 주는 희망의 선물로,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그들은 지금도 예수님의 무덤 앞에서 외치고 있습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