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고유한 향기가 있다. 기자가 이 인터뷰 기사를 위해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서 누리는 축복은 아름다운 스토리를 듣는 것이요 아름다운 사람의 향기를 느끼는 것이다. 김광식 장로와 그의 아내 김사정 권사를 만나 삶을 듣고 신앙의 향기를 느낀 시간은 행복보다 더 좋았다. 인터뷰를 끝내고 기자가 기도하며 눈물이 쏟아졌다. 하나님, 교회, 성도, 목사… 누구에게도 분노나 원망이 없는 삶의 고백들… 진주처럼 아름다웠다.
기자는 김 장로와 대화하는 시간내내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을 위해 조심스럽게 살다 하늘나라에 가신 기자의 아버지를 추억했다. 꾸밈없는 미소, 소박한 소원들, 하나님 나라를 향한 아름다운 열심 그리고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고 싶지 않는 선하고 착한 마음, 아름답고 귀한 믿음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자에게 주신 축복이요 은혜임을 고백하며 이 글을 쓴다.
독립운동가요 순교자인 할아버지
김광식 장로는 훌륭한 믿음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김 장로의 할아버지 故 김석창 목사는 한국교회사에 자주 등장하는 순교자이시다. 김석창 목사는 평안북도 철산에서 태어나 살다가 결혼한 후에 온 가족과 함께 선천으로 이사를 하여 미국 북장로교 위대모(Rev. Norman C. Whitmore, 魏大模) 선교사를 만나 전도를 받고 그 길로 부모들과 함께 온 가족이 예수를 믿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
열정적인 신앙생활에 감동받은 위대모 선교사는 김석창에게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진학해 교회지도자가 될 것을 권유하였고 김석창은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 공부를 한다. 조선야소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되기 직전인 1911년 3월 제4회 평양장로회신학교 졸업생이 되었다. 평북노회에서는 그를 졸업과 동시에 선천남교회(宣川南敎會)를 개척, 설립할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하였으며 김석창은 그해 가을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자신이 개척한 선천남교회의 담임목사가 된다.
김석창 목사는 청년 시절부터 애국애족하는 마음이 강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그가 관계하고 있는 신성학교와 보성여학교에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때마침 전국적으로 1919년 3.1 민족독립운동이 비밀리에 전개되고 있을 때, 김석창 목사는 신성학교 교사이면서 자기 교회 교인이었던 홍성익, 김지웅, 양준병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의논하였다. 선천에서도 이미 신성학교와 보성여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제 경찰은 선천지방 만세운동이 김석창 목사의 주도였다는 사실을 주지하고 김석창 목사를 요주의 인물로 특별관리했다. 그러던 차에 1920년 4월에는 신성학교 출신인 박치의가 선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다. 일제 당국은 김석창 목사가 연계되었다며 김석창 목사를 끌고가 그에게 심한 고문을 가했다. 결국 김석창 목사는 이 일로 인해 8년간의 긴 옥고를 치룬다. 김석창 목사는 이때 받은 잔혹한 고문의 여파로 평생 팔을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는 장애인으로 지냈다.
해방 후 1946년에는 곽산교회(郭山敎會)에서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귀가하던 도중에 괴한들에게 피습을 당해 오랫동안 병고를 겪기도 하였다. 1947년 진갑을 맞이해 함께 모인 자리에서 가족들에게, 이곳에서는 공산당의 횡포로 앞으로는 신앙생활이 어려울 것을 예견하고, 모두들 남쪽으로 월남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자신은 교회를 위하여 교인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으면 목자로서 끝까지 돌보아야 할 임무가 있음으로 월남하지 않겠노라고 선언하고 교회를 지켰다. 1950년 6.25 전쟁 발발 후 유엔군이 북으로 진격하자 유엔군 환영 행사를 주도한 김석창 목사는 유엔군이 철수하자 북한 공산군에게 붙잡혀 총살당하며 순교하였다.
김석창 목사는 평북노회장을 3차례나 역임하였다. 이는 지역 내 목회자들과 교회지도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는 증거다. 나아가 김석창 목사는 1926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5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피선되어 총회장으로 많은 일을 하기도 했다. 정부는 1963년 김석창 목사의 독립운동과 반공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김광식 장로의 아버지인 故 김희철 장로는 가난한 목회자의 삶의 희생양이었다. 아버지 김석창 목사는 명철하고 은사가 돋보인 넷째 아들 김희철이 목사가 되기를 강하게 바랐지만 김희철은 결국 아버지 뜻을 어기고 장로가 된다. 목회자 아버지의 고단한 삶을 보아온 김희철은 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가 없었다. 크게 빗나가지는 않았지만 목회자의 길은 가지 않았다. 아버지의 뜻을 어긴 것이 평생의 짐이 된 김희철 장로는 평생 목사님을 열심히 섬기는 신앙인으로 살았고 자신의 맏아들 김광식 장로가 목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따르지 못한 아버지의 뜻
아버지 김희철 장로가 할아버지 김석창 목사의 뜻을 따르지 못하고 목사가 되지 않은 것처럼 김광식 장로도 아버지의 뜻을 어긴다. 처음부터 아버지의 뜻을 어기지는 않았다. 아버지 뜻을 따르려고 연세대 신학과까지 진학했다. 그런데 신학을 공부하며 점점 목회에 대한 부담감을 얻는 대신 자신감을 잃었다. 그리고 우연히 도미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목회자의 길을 접었다. 이민자의 삶을 정착하고 살아오면서 여유 없는 삶을 핑계 삼아 자연스럽게 목회자의 길을 접은 것이다.
특별한 방법으로 따르는 아버지 뜻
할아버지의 뜻을 어긴 아버지가 자신을 대신하여 아들이 목사가 되기를 원하시는 그 뜻을 김광식 장로가 어긴 것이다. 김광식 장로는 아버지의 뜻을 어긴 것이 평생의 짐이요 부담이다. 이민자의 삶을 시작하면서 공무원이 되었다. 다른 길을 생각하지 못하고 한동안 살았다. 그러나 늘 마음 한켠에 남아 있는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과 부담이 있었다. 그래서 목사의 마음으로 섬기는 일들을 시작하였다.
우연히 시작한 사역이 마약중독자 순화 사역이었다. 마약 중독자들을 도와 그들이 그 마약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을 도왔다. 그들이 중독을 이기고 새 삶을 살게 하는 재활프로그램이었다. 열심히 돕고 섬겼다. 나름대로 보람도 느꼈다. 그런데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문화와 언어의 장벽이 너무 컸다. 한인 커뮤니티였지만 섬겨야 할 대상들이 주로 한인 2세 젊은이들이었다.
마약중독자 순화 사역에서 직면한 한계로 고민하다가 호스피스 사역에 눈을 뜨게 된다. 제대로 사역하고 싶은 마음에 한국으로 건너가 샘물 호스피스에서 연수도 받았다. 2001년 5월 1일 공식적으로 이 사역을 시작했다. ‘엔젤스 크리스천 호스피스’라는 비영리 법인도 만들어 활동을 시작했다. 인생의 마지막 지점을 보내고 있는 환우들을 돕고 그들을 섬기는 것은 의미있고 보람된 일이다. 환우에게 복음도 전하고, 환우의 천국 삶을 준비케 하는 사역이다. 호스피스 사역은 많은 희생과 헌신을 요구한다. 육체적 섬김과 노동은 물론 감정 노동이기도 하다. 쉽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사연과 간증을 남긴 호스피스 사역은 큰 보람으로 남는다.
힘든 호스피스 사역을 돕던 사람들이 지치고 힘들어 하는 시점에 김광식 장로는 원목실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김광식 장로의 아내 김사정 권사가 간호사로 오래 근무한 LA 카운티 병원 원목실의 요청을 받은 것이다. 친분이 있는 병원 원목실 관계자의 추천과 권유로 시작한 원목실 사역은 환자들과 그 가족들을 대상으로 전문 사역을 제공한다. 예컨대 상담과 영적 돌봄을 제공한다. 그러나 때로는 자질구레한 심부름도 한다. 예를 들면 통역과 무보험자들을 소셜 담당자에게 안내하는 일 등등 다양하다. 이런 섬김과 돌봄을 통하여 주님 사랑을 전하며 직간접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은 감사하고 복된 일이다. 이런 일을 하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 김희철 장로님과 할아버지 김석창 목사님을 뵐 면목이 생겼다.
비전과 기도의 제목
김광식 장로가 교회를 향한 기도의 제목과 비전을 내어놓을 때에 기자는 눈물이 났다. 이토록 아름답게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를 사랑하는 장로가 우리 주변에 계시다는 사실이 감사했다. 김 장로는 40년 이상 섬겼던 나성영락교회를 떠났지만 나성영락교회를 위한 기도를 쉬지 않는다고 했다. 현재 섬기는 기쁜우리교회도 김 장로의 기도제목이다. 더 바르게 더 건강하게 성장하기를 기도한다. 그 비전과 기도의 제목이 너무 좋아서 기자의 가슴이 먹먹했다. 진짜 예수쟁이의 기도요 소원이었다. 인터뷰 시간 내내 김 장로의 순수하고 맑은 영혼을 느끼는 행복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