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9)

 

  기독교는 복음, 즉 사람들에게 전하는 좋은 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뉴스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뉴스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있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무신론자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번에 무신론이 얼마나 증명하기 어려운 이론인지에 대해서 몇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계속해서 기독교인들이 왜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지에 대해서 간단하게 몇 가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바울은 (롬 1:19)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그리고 다음 절에서 그는 "그(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이유를 첫째로 우리 안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능력이 내재해 있으며, 둘째로 자연과 우주에도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 두 가지 중에서 우리 안에 보여 주신 하나님의 모습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인생의 종교 본능 
  첫째로 우리 안에 하나님을 알 만한 능력은 인간의 종교심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람이 금수와 다른 점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현저한 것은 사람에게는 종교가 있는 것입니다. 금수 사회에는 종교가 없습니다. 문명한 사회에도 교회가 있고, 야만 사회에도 신당이 있습니다. 동양에도 종교가 있고, 서양에도 종교가 있으며, 아프리카에도 종교가 있습니다. 또한 현대에도 종교가 있고, 옛날에도 종교가 있었습니다. 동서고금을 물론하고 어느 사회나 문화 가운데 종교가 없는 곳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께서 안 계신 것처럼 사는 사람들도 흔히 위급한 일을 당하게 도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저는 전에 믿지 않는 형제와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몇 해 전 38선을 몰래 넘어 오면서 자신이 하나님을 찾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은 괴뢰군에 억지로 붙들려 갔다가 석방되어 나온 애국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괴뢰군에게 붙잡혀서 북쪽으로 끌려가다가 삼각산 골짜기에 숨었습니다. 바로 그때에 유엔군 비행기들이 편대를 지어와서 폭격을 하고 기관총을 쏘아댔다고 합니다. 그 청년이 나중에 보니까 공산당들과 정치보위부 사람들이 모두 솔포기 아래 엎드려서 "하나님, 하나님"하고 소리를 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은 이렇게 자기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위급한 일을 당하면 하나님을 찾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인류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모두 고칠 수 없는 종교 라는 병에 걸려 있다."

  또 한 가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본능이 있는데, 본능이 있으면 반드시 그 본능을 만족시킬 대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에게는 먹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먹는 본능을 만족시킬 음식물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사교적 본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교 본능을 충족시킬 수 있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성에 대한 본능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본능을 만족시킬 남성과 여성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본능이 있으면 반드시 그 본능을 만족시킬 대상이 있습니다. 사실 그 대상이 있기 때문에 본능이 생겼는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빛이 있기 때문에 우리 눈이 생겼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빛이 없으면 우리 눈은 아무 쓸모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습니다. 또 사람의 육체에는 여러 가지 감각 기관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감각 기관이 감지할 대상이 반드시 있습니다. 예를들어 우리에게 코가 있으면, 그 코가 감지할 냄새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눈이있으면 눈이 감지할 빛과 대상이 있습니다. 
  어떤 책을 보니까, 깊은 굴속에 연못이 있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연못에 사는 고기는 눈이 없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캄캄한데 사는 고기에게 눈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감각 기관이 있는 것은 그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빛이 있으니 눈이 생겼고 ,소리가 있어서 귀가 생겼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종교적 동물이요, 종교성이 있는 것도 그 대상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숭배하려고 하고, 그 대상을 동경하는 마음은 부인하려고 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욕망을 충족시킬 대상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인간 속에 종교성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봄에 풀이 위로 자랍니까? 그것은 위에 태양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의 마음이 높은 것을 앙망하고 동경합니까? 그것은 위에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플라토(Plato)는 "무신론은 한 질병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무신론자를 일종의 환자로 간주했습니다.


2. 인간의 도덕성 
  둘째로 우리 안에 하나님을 알 만한 능력은 우리의 도덕으로 나타납니다.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칸트(Kant)는 인간의 도덕성에 대해 이러한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하늘에는 별이

(Photo : ) 한경직 목사
(Photo : ) 한경직 목사

있고 사람의 속에는 도덕적 의식이 있다." 이것을 쉽게 말하면 사람들 안에는 양심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 안에는 이러한 양심이 존재하여, 무슨 일을 할 때마다 그것이 선한 일인지, 아니면 악 한 일인지를 분별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때는 이 양심이 마비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양심이 완전하게 마비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어느 한 구석에서 선악을 분별합니다. 그리고 선한 일을 할 때는 마음이 기쁘고, 악한 일을 하면 얼굴이 경직되고 불안해 집니다. 양심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잘하는 사람을 칭찬하고, 잘못하는 사람은 책망합니다. 물론 인간의 도덕성을 부인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양심을 여러 가지로 설명해 보려고 애씁니다. 그들은 "양심은 한 종족의 공통된 유전적 산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양심이 선천적인 능력이 아니라, 후천적인 것이라고 설명하려고 애씁니다. 

 

  물론 양심 가운데 후천적인 요소가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양심 안에는 분명히 선천적 요소가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도덕적인 법칙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바울은 "양심이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말합니다(롬 2:12-15). 다시 말해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에 이미 그 안에 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심어 주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자연계에 자연법칙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물질은 이 자연법칙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사람에게도 도덕적인 법칙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도덕적인 법칙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자연 법칙과 도덕적 법칙은 다른 점이 있습니다. 물질은 시키지 않아도 자연법칙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를 부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스스로 선과 악을 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이 자유를 바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양심을 부여하셨습니다. 인간은 이 양심의 법이 옳다고 하는 것을 따라 살 때에 행복을 느낍니다. 그러나 양심의 법이 악하다고 하는 일을 하면 고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양심은 사람이라면 그 누구에게든지 다 새겨져 있습니다.

  이 골짜기를 파도 물이 나오고, 저 골짜기를 파도 물이 나오면 그 밑에 물이 있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때에 이 사람의 마음 속에도 양심이 있고, 저 사람의 마음 속에도 양심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인간의 배후에 그 양심을 심어 놓으신 큰 양심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양심은 우리 마음 속에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음성을 볼 때에 그 음성을 발하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에는 양심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자주 양심을 거역하기 때문에, 결국 양심이 불도장을 맞은 것처럼 되어 마비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들에게도 여전히 양심은 살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안에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들(종교성, 도덕성)이 존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