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부정

토마스 맨튼 | 박홍규 역 | 믿음과행함 | 388쪽 

기독교는 교만을 매우 싫어한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교만함을 경계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교만'이라는 단어가 강단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이제 모든 사람들이 겉으로 보기에도 교만한 사람은 몇 안 되기 때문일 것이다. 교만하게 보이는 순간 공격을 당하거나 '왕따'를 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교만함이 사라졌을까? 아니다. 교만함은 지금 '자기 중심성'이라는 가면을 바꿔 쓰고 다닌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밖으로 드러내놓고 거부하지는 않지만, 자신들의 삶을 간섭하는 것에 대해 매우 불쾌해 한다. 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기보다는, 자신이 이해되고 납득되는 하나님에 대해서만 믿음을 가지고자 한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치중돼 있다. 분명 자신의 영혼과 내세를 위한 준비에 대해 관심이 없다.

자유의지

현대 신학은 점점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현재 어느 정도 자유의지를 강조할 필요성은 충분히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대부분의 신학이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쪽에 강조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유의지 논쟁은 지금으로부터 약 1,600년 전부터 있어왔다. 어거스틴과 영국의 수도사 펠라기우스의 논쟁에서 어거스틴이 승리하면서, '인간의 전적 타락'과 '원죄' 등에 의해 인간의 자유의지는 부정적 입장의 견해에 놓이게 되었다. 물론 '전적 타락'과 '원죄'의 교리는 기독교에서 매우 중요한 교리이며, 로마가톨릭의 '부분적 타락'과도 분명히 구별되는 중요한 교리이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부정적 입장은 얼마 전 헐리웃에서 만든 영화 <아바타>처럼 인간을 무능력한 육체 덩어리로 여기게끔 하는 오해를 양산했다. 'Avatar'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Ava(내려옴)+tara(땅), 즉 '물질계에 몸을 입고 내려온 영적 존재'라는 뜻이다. 하지만 영화에 나온 '아바타'가 인간이 접속하지 않으면 죽은 육체 덩어리에 불과했던 것처럼, 우리 인간에 대해 영혼과 몸, 종교와 세상을 분리시키고 있다.

이러한 부분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인간관에서 많이 멀어져 있다. 실재적인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기계적이고 유물론적 관계로, 즉 인간을 프로그래밍된 인공지능 AI(artificial intelligence) 로봇 정도로 보는 오해들을 양산하기 때문이다.   

역설적인 현재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재 그리스도인들의 다수는 '자기 중심성'이 강해짐으로써, '자기 의지'가 강해지고 있다. 반면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프로그래밍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듯한 인상을 심어주는 신앙관이 이와 뒤엉켜 매우 혼란스럽고 어수선한 가운데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성도들은 종교적 삶과 세상 안에서의 삶이 일관성을 잃은 채 분열된 삶을 살고 있으며, 이들은 교회 안에서와 세상 속 삶의 현장에서 정신적으로도 분열된 정신적 분열을 겪고 있다면 과장일까?     

자기 부정  

토마스 맨튼의 글은 본서가 처음이다. 그는 토마스 굿윈, 존 오웬, 리차드 백스터 등과 동시대에 그들과 더불어 큰 명성과 존경을 받았던 인물로 본서의 표지 날개에 소개된다.

본서를 차분히 읽어가면서 느꼈던 혼란스러운 부분 두 가지를 먼저 말하자면, 먼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서이다.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듯 하다가 자유의지를 전면 부인하는 듯 하니,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었다. 이런 부분은 신학의 발전과정을 보는 듯한 스릴을 느끼게 해 준다.

둘째, '옛 자아'와 '새 자아'에 대한 구별이 없어, 위에서 언급한 '아바타'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들이다. 자아를 부정할 때 하나님이 자아를 부정하도록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새롭게 태어난 새 자아로 인해 옛 자아를 부정하는 '새 자아'에 대한 개념을 전제로 본서를 읽을 필요가 있다.

본서는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적 차원의 자기 부정, 하나님과 관련된 자기 부정, 이웃과 관련된 자기 부정 등이다. 일반적 차원에서 자기 부정은 세례 요한의 고백과 같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드러내야 할 필요성을 여러 방면으로 제시하고 있다. 특히 '자기 부정의 징표들과 표시들, 자기 부정의 수단'은 저자가 심혈을 기울여 깊은 묵상과 고민을 통하여 매우 세세하고 실제적인 부분들을 다루고 있다.

2부 하나님과 관련된 자기 부정은 하나님 앞에서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를 부정하는 종교적 부정을 다루고 있다. 이 부분 또한 깊은 묵상과 목회의 현장에서 만나는 여러가지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기 위한 노력들을 엿볼 수 있다. 이 부분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데,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와 친밀함을 소홀히 함으로 하나님의 권위에 압도되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이것 또한 봉건 시대의 사상적 한계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3부 이웃과 관련된 자기 부정은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결론

본서는 우리 개신교의 뿌리인 청교도의 중요한 신앙 유산이다. 이들의 믿음과 눈물, 땀방울을 먹음으로써 오늘 우리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글들을 읽으면서 공통되게 느껴지는 것은 진리에 '신실함', '진지함'이다.

이들 또한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이들은 적어도 신앙을 자신들의 성공을 위한 발판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들의 글에서 '권위적인 하나님'을 만나지만, 아마 짐작컨대, 이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하나님의 권위' 앞에 순종하였을 것이라 상상된다.

본서가 말하는 자기 부정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한 과정과 여정들을 넘어 그리스도인의 책임이다. 자기 부정은 하나님 앞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행해져야 할 실제 행위들이다.

필자가 본서를 읽으면서 강하게 느낀 것 중 하나가 바로 '목회 현장에서 만나는 실제적 문제들',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실제적 문제들'에 대한 매우 세세하고 구체적인 고민과 묵상들이었다. 진지한 자기 부정을 생각하는 분들에게 본서를 추천한다.

/강도헌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운영자, 제자삼는교회 담임, 프쉬케치유상담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