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Afghanistan)

공식 이름은 아프가니스탄 공화국 (Republic of Afghanistan)이다. 아프가니스탄이란 뜻은 ‘아프간족의 토지’를 의미하고 면적 64만 7,500㎢. 인구 2,582만 5000명(1999). 인구밀도 41명/㎢(1999). 수도는 카불이고 공용어로 파쉬툰어와 다리어를 사용하고 있다. 파미르 고원의 남서쪽에 있으며, 동쪽과 남쪽은 파키스탄, 서쪽은 이란, 북쪽은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북동쪽은 중국 신장웨이우얼자치구에 접한다. 그러다가 18세기 중엽부터 아프간족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현재와 같은 크기의 아프가니스탄 왕국이 형성되었다.

주민
아프카니스탄의 주민은 고대부터 많은 이민족들이 침입하였기 때문에 민족 구성은 매우 복잡하다. 주요 민족은 아프간(파탄)족,·타지크족, 우즈베크족, 하자라족이다. 아프간족의 대부분은 동부 또는 남동부에 거주하며 유목생활을 하는데, 파슈툰이라고 자칭하며 파슈토어를 사용한다.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타지크족은 헤라트와 카불에 거주하며, 농민, 도시 또는 오아시스의 상인이 많다.

정치
BC 250년경에 박트리아의 디오도투스는 그리스계의 독립왕국을 만들고, 같은 무렵에 출현한 파르티아 왕국과 남서부의 세이스탄 및 아리아 지방을 두고 다투었으나 패배하였다.
박트리아 왕국은 BC 175년에 인도 펀자브의 대부분을 차지하였 으며 그 결과 불교가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갔으나, 북쪽의 대월지(서쪽의 파르티아와 사카족에 둘러싸여 차츰 압박을 받게 되었다. 3∼4세기에 쿠샨 왕조는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와 인도의 굽타 왕조 앞에서 힘을 잃었으며 5세기에는 에프탈의 침입을 받았다. 그 결과 6세기의 이 지방은 쿠샨 ·에프탈 등의 왕조로 나뉘어 통치되었다. 642년 아랍의 확대에 따라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멸망하였고 671년에는 아프가니스탄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호라산 지방도 아랍의 지배하에 들어가 이 지방의 주민은 결국 이슬람교를 믿게 되었다. 820 년에 호라산 태수로 임명된 아바스 왕조의 장군 타히르가 타히르 왕조를 세 웠는데, 그 후 867년의 이란계 사파르 왕조, 874년의 사만 왕조, 962년의 가즈나 왕조, 1187년의 구르 왕조, 1215년의 흐와리즘샤 왕조로 이어져 나가다가 21년에 몽골의 침입을 당하였다. 몽골의 지배는 1397년 티무르의 침입으로 끝나고, 티무 르의 자손은 헤라트를 수도로 삼고 이란 문화를 보호하였다. 1526년에 티무르의 자손 바부르는 델리의 왕위에 올라 무갈 왕조를 이룩하였으나, 그 후 약 200년간 아프가니스탄은 이란의 사파비 왕조와 무굴 왕조로 분할 영유되었다.

아프간족의 마흐무트는 1722년 이란에 침입하여 사파비 왕조를 타도하였으나, 37년에 투르 크계의 나디르샤가 이란에서 아프간족을 몰아내었으며 이어 칸다하르와 카불을 점 령하고 델리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나디르샤는 47년에 암살되었으며 그의 부하인 두라니족(아프간족 주요 부족의 하나)의 지도자 아흐마드 한 아브달리가 그 해에 칸다하르에서 왕위에 오 르고 아흐마드샤 두라니라 칭하였다. 이것이 아프간 민족국가 건국의 시초이다. 아흐마드 샤 다음에는 그의 아들 티무르 샤가 즉위하고 카불을 수도로 정하였다. 그가 죽은 뒤 왕위 다툼이 일어났으며 결국 바라크자이족의 도스트 무하마드가 왕 위에 올랐다. 그는 1838년에 정식으로 카불의 아미르(왕)라고 칭했으며, 이에 구 왕국시대의 바라크자이 왕조가 성립되었다. 19세기부터 아프가니스탄은 영국과 러시아의 항쟁의 대상이 되었다. 인도 방위의 입장에서 러시아의 남하정책 에 위협을 느낀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자국의 세력하에 두려고 하였으며, 도스트 무하마드와 그의 아들 시르알리 때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제1차(1838∼42), 제2차 (78∼80) 아프간전쟁을 일으켰다. 그 결과 아프가니스탄 영토의 일부가 인도에 할 양되었으며, 93년 아브도르 라흐만 칸 때 인도와의 국경선이 확정되고 1901년에는 연금을 받기로 하고 외교권을 인도에 일임하게 되었다. 1905년 하비브알라가 이 조약을 비준함으로써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다.

또한 1907년에는 러시아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영국의 우위를 인정하였다. 하 비브알라는 내정면에서는 하비비아 학교의 기초를 다지고 페르시아어 주간신문을 발행하여 민족적 자각의 향상을 촉진함과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해 중립을 엄수하였다. 1919년 하비브알라가 반 영국주의자의 손에 암살된 후 같은해 후계자가 된 아만알라는 반영국적 의견에 동감하여 인도 정부에 대해 적대행위를 취했으나(제3차 아프간전쟁)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8월에 라왈핀디 화 평조약이 맺어졌다. 이 조약으로 인도 정부로부터의 연금이 폐지되고 외교지도권 폐지가 약정되었으며 아프가니스탄의 독립이 정식으로 승인되었다.

왕은 국내 통일과 서양문화 도입에 힘썼으나 보수세력의 반대로 퇴위한 뒤 망명하였다. 뒤를 이어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연 나디르한까지 1933년 암살당하자 그의 아들 자 히르 샤가 19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 후 오랫동안 왕위를 유지하였으나, 1973 년 7월 국왕의 외유 중에 쿠데타가 일어나 모하마드 다우드 칸 전 총리가 실 권을 쥐고 공화제를 선언하였다.

사회
아프가니스탄 사회상의 중요한 특징은 지배민족인 아프간 족(파탄족 혹은 파슈툰족)이 지니는 ‘파슈툰와레이(파슈툰 정신)’라고 하는 독특한 도덕·관습법이다. 이는 용기·자유·독립을 숭상하며 이슬람교 이상으로 그들을 규제하고 있다. 3차에 걸친 아프간전쟁에서 영국군을 괴롭히고, 최근의 아프가니스탄 사태에서 소련군을 애먹인 것도 이 정신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이 정신의 순수성을 크게 나누면 폐쇄촌락, 개방적 촌락, 도시의 3단계가 된다. 외국인이 들어갈 수 없는 폐쇄촌락에서는 이 정신이 가장 순수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는데, 다툼이 끊이지 않는 반면 자존심과 독립심을 지니고 질박하면서도 강건한 생활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남녀의 권리도 비교적 평등하다고 한다.

개방적 촌락에서 도시로 개화해감에 따라 순도가 낮아지는데, 도시에서는 이 정신을 지키는 한편으로 선진문화를 받아들이고 있다. 남자는 일반적으로 터번을 두르며 상류계급의 여자는 외출할 때 반드시 차도르라는 길고 검은 베일을 착용하게 되어 있었는데, 1959년부터는 착용이 자유화되었으며 지금은 양장 차림의 여성도 있다. 그러나 농민과 유목민 여자는 천으로 얼굴을 가리며 집에 칩거하는 경향이 많다. 주거는 다른 중동 국가들처럼 돌이나 흙벽돌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며 유목민은 천막에서 생활한다.

모든 교육이 무료로 이루어지는데, 초등학교는 전국적으로 급속한 증가를 보이 는 반면 중등 이상의 교육시설은 도시에 집중해 있다. 대학은 카불대학(1932년 창 설)과 잘랄라바드의 낭그라하르대학이 있으며, 사범·공업·상업·농업·미술 등 의 전문학교도 있다. 그러나 문맹률은 아직도 81.8%나 된다.

신문·통신·출판물은 정부의 통제하에 있으며, 국영방송 1개국, 일간신문 13 개가 있다. 스포츠는 근대경기 중에서는 하키가 성행한다. 지리적으로 동서교통의 요지에 있었기 때문에 여러 문화의 유적이 많으며, 조각·상아제품·유리단지· 청동 입상·화폐·세밀화 등의 발굴이 빈번하다. 특히 바미안의 거대한 석불(높이 53m)은 3~5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대한관계
북한 단독수교국이다. 한국과는 1973년 7월 수교했으 나 1978년 9월 좌경정권의 수립에 따라 단교하였다. 1997년 현재 대한수입 4,233만 달러, 대한수출 38만 달러이다. 주요 수입품은 직물, 가전제품, 담배 등 이다.

/기독신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