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인 프루이트 목사. ⓒ미국 크리스천포스트
(Photo : ) ▲셰인 프루이트 목사. ⓒ미국 크리스천포스트

미국 텍사스 남침례회 선교부 셰인 프루이트(Shane Pruitt) 목사가 최근 크리스천포스트에 '용서에 관한 7가지 신화'라는 제목의 칼럼을 게재했다.

프루이트 목사는 "성경에서 가장 두려운 부분 중 하나는 마태복음 6장 14~15절일 것이다. 이 구절에서 예수께서 '네가 네게 죄를 지은 이를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너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네가 다른 이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너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면서 말문을 열었다.

프루이트 목사는 "이는 구절은 T셔츠나 커피잔, 보안 스크린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구절이다. 이 구절이 유명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 삶의 불편한 부분을 깊이 파고들면서 우리가 행하기 어려운 부분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며 "이 구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이들에게 은혜를 끼쳐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만약 여러분이 다른 이들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이는 여러분 스스로가 진실로 하나님께 용서를 받지 못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 된다고 말씀하신다. 보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그분은 우리가 세상에 '용서의 방법'을 보여 줌으로써 '용서의 복음'을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실천적인 길을 가르쳐 주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 그렇다면 용서란 무엇인가? 위키피디아는 용서에 대한 최고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용서란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한 감정이나 태도 변화를 의도적·자발적으로 경험하는 것으로, 복수심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버리고 가해자가 잘되길 바라는 능력이 커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진정한 용서란 단순히 분노, 쓰라림, 원한을 내버릴 뿐 아니라 여러분에게 상처 준 이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 진정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가? 하나님 앞에 그들의 죄를 고할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주님께 그 사람의 복을 빌 수 있을까? 이는 극도로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라고 했다.

프루이트 목사는 마지막으로 "정직해지자! 우리의 용서하지 못함과 쓴뿌리는 실제로 매우 어리석고 사소한 상황들 때문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마음이 깨지고, 허무해지고, 큰 상처를 안고 있다는 이야기들도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의 경우, 용서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왜냐하면 하나님 수준의 용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서의 신화들은 우리에게 불리한 장애가 되고 혼란을 주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승리를 진정으로 경험하지 못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에 대한 신화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들을 신화라 부르기로 한다"면서 다음과 같은 7가지를 소개했다.

첫 번째 신화, 용서란 여러분이 잊는 것을 의미한다. 

불행히도 여러분에게는 영화 '맨 인 블랙'에서 등장하는 기억제거장치인 '뉴럴라이저'가 없다. 기억은 매우 실제적이다. 특별히 상처로 덮인 기억일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항상 그곳에 있다. 그러나 삶 속에서 이를 다룰 매우 놀라운 기회가 있다. "난 계속 잊을 수가 없었어. 매우 잘 기억이 나.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여전히 잊기로 선택하고 있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신화이다.

두 번째 신화, 용서란 여러분이 그들의 행동을 묵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경우, 우리는 "용서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내게 한 행동이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이는 신화이다. 용서는 하나님의 궁극적이고 완전한 심판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분쟁을 어떻게 다룰지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신다. 결국 그분은 죄인과 죄적인 행동을 다루는 데 있어서 전문가이시다.

세 번째 신화, 용서란 여러분이 신발을 터는 매트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종종 우리는 용서에 대해 매우 불안해한다. 왜냐하면 상처를 받는 것, 또 받을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서란 나 스스로가 계속 학대받고 남용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 내가 그들을 다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한 데 대해 죄책감을 가질 수도 있다. 이는 그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용서란 나 스스로를 보호하고, 상대방으로 인한 쓴뿌리를 내게 옮기지 않음으로써 자유해지는 것이다.

네 번째 신화, 용서란 여러분이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용서란 여러분이 누군가와 지속적으로 가깝거나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때로는 두 사람에게 가장 건강한 것이 거리를 두는 것일 수도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고, 다른 이들에게 친절히 대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어디에도 누군가의 친구가 되라고 말씀하신 적은 없다.

다섯 번째 신화, 용서는 사과에서 온다. 

우리는 종종 '미안해'라는 말이 모든 상처를 치유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정한 용서는 이 같은 동정의 말이 아닌, 전능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하나님께서는 용서한 사람을 먼저 용서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을 용서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용서와 기쁨을 진정으로 경험하게 된다. 그럴 때만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가해자에게 용서를 베푸실 수 있는 건강한 자리에 있게 되는 것이다. 즉, 용서는 우리가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여섯 번째 신화, 용서는 상대방의 행동에 따른 것이다. 

때로 사람들은 "난 저 사람이 내게 용서를 구하고 용서받을 만한 행동을 할 때 용서할 거야"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화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군가 내게 용서를 구하든 구하지 않든, 용서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승리는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오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다. 은혜는 비록 그가 받을 자격이 없다고 해도 그에게 무언가를 줄 때 오는 것임을 기억하라.

일곱 번째 신화, 용서는 쉽다. 

슬프게도 용서는 쉽지 않다. 그러나 또한 어렵지도 않다. 용서는 실제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의 천성은 원한, 쓴뿌리, 분노를 붙잡길 원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어느 수준에서 우리에게 통제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처를 받은 만큼 주길 원한다. 우리는 단순히 이 같은 감정들을 바꿀 수 없다. 그러나 복음이란,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이다.

비록 용서에 대한 많은 신화들이 있지만, 진리는 단 한 가지다. 그것은 쓴뿌리, 원한, 분노는 다루기가 매우 무겁고 불행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그리스도 앞에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되는 용서의 진정한 승리를 경험할 때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9)